이용덕의 삶과 예술, 그의 작업은 어디에서 왔는가
- 시간과 공간의 교차점으로서 인간을 빚다
조상인, 백상미술정책연구소장
흙 만지며 자란 소년, 주머니를 뒤집다
“어릴 때 일이지만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당시 카메라 원판필름이 어른 손바닥만큼이나 컸다는 점, 그리고 사진을 찍어 나온 네거티브 필름 위에 날렵하고 길게 깎은 연필심으로 살살 수정하던 아버지의 모습이에요. ‘필름 위에 연필로 이렇게 칠하면 인화된 사진에서는 하얗게 나타나거든’ 하시며 뾰족한 연필로 수공 포토샵 하시던 아버지가 생각나네요.”
예술가적 재능이나 소질의 대물림이 있다면 조각가 이용덕에게는 사진을 다루던 아버지의 영향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늘 안방 한가운데서 책 보고 계시던 아버지, 붓글씨는 또 얼마나 잘 쓰셨는지 동네 집집마다 우리 아버지 글씨가 있었어요. 내가 ‘남 주는 거 아까워요’ 했더니 ‘본래 재주 있는 놈이 재주 없는 놈 종 노릇 해주는 법이란다’ 하시더라고요.”
2011년 제25회 김세중 조각상 수상자로서 소감을 밝히며 이용덕은 선친의 이 말을 인용했다. 스승이자 선배 조각가인 김세중의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상기시킨 동시에 “내 작품을 보며 재미있어할 사람들을 위해 내가 가진 재주를 동원해 뭔가를 해 내는 삶”을 이야기했던 것이다.
재주가 곧 돈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었으니, 1960~1970년대 대한민국의 빈곤한 일상에서 그리 넉넉하지 않은 살림살이는 어머니의 몫이었다. 어머니는 쓰다 남은 자투리 천을 이리저리 자르고 배치해 엮는 조각보에 일가견이 있었다. 천 조각이 덧붙으면 멋이 더해졌다. 막내 이용덕이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어머니는 그 손재주로 4남 1녀 아이들의 옷을 직접 만들어 입히셨다. 부끄러울 뻔 한 가난이, 특별한 멋을 지닌 자랑이 되었던 시절이다. 이용덕은 아버지의 정교한 손기술과 사려 깊은 철학을, 어머니의 미적 감각과 솜씨를 물려 받았다.
예술가의 핵심적 개념이 잊고 지내던 어릴 적 기억 한 조각과 통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용덕은 서울시 서대문구 홍제동에서 나고 자랐다. 당시는 허허벌판 채소밭 사이에 드문드문 한 두 채 집이 있던 시절이다. 산에서 내려온 지류가 홍제천과 만나는 자리에는 고운 점토가 쌓였다. 그 진흙밭이 어린 이용덕의 놀이터였다. 말캉한 흙으로 사람도 탱크도 만들었다. 밥 되면 집으로 불려 들어갔고, 밤이면 낮에 빚은 것들이 말랐나 부러졌나 궁금해하다 잠들곤 했다. 그림도 곧잘 그렸다. 흙 위에 나무 막대기로 그리기도 했고, 흙을 도톰하게 돋우고 그려 부조(浮彫)를 만들기도 했다.
열 살 즈음의 기억이다. 문득, 실내화 주머니를 뒤집었다. 네모난 주머니에 손잡이가 달린 천 가방의 안팎이 뒤집혔다. 똑같았다. 바느질 자국과 실밥들이 드러나 보였을 뿐, 형태는 뒤집기 전과 다를 바 없었다. 바지 안쪽으로 들어가 있는 주머니도 밖으로 빼 뒤집었고, 양말도 뒤집어봤다. 겉과 속, 안과 밖을 반전시키더라도 그 형태가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무척 신기하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뒤집어진 실존(實存)’으로서 ‘역상 조각’의 개념이 움트기 시작한 것 아닌가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런 어린 시절을 보내며, 미술대학에 진학해 예술가가 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인체 탐구와 형태의 객관화
1977년 3월 서울대 미술대학 조소과에 입학했다. 김세중, 최만린, 최종태, 최의순, 엄태정 등 모더니즘을 실천하는 스승들에게서 조각을 배웠다. 형태와 구조, 통용되는 미학적 원리 같은 객관적인 내용과 조형의 세계를 파고들어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내는 태도를 익혔다.
주제적으로는 주로 인체에 몰두했다. 어릴 적부터 일관되게 이어온 인체에 대한 관심이었다.
“인체는 그 자체로 엄청난 정보를 담고 있는 대상이지요. 나는 이를 조각하려는 것입니다. 사람을 보는 순간, 평소 유심히 관찰하는 습관 때문이겠지만, 그 사람의 몸체, 그 몸 위의 옷감, 옷 위의 주름, 주름 위를 흐르는 바람의 움직임까지 느낄 수 있습니다. 내가 관찰한 정보량만큼 고스란히 조각에 담기고, 그리하여 ‘실감’나는 작업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긴장감과 함축성 등 일련의 정보들은 관찰에서 비롯하고, 관찰은 애정입니다. 관찰과 생각은 모든 것을 지배하는 근거이니, 인체는 인간에 대한 애정을 드러냅니다. 다만, 내가 표현이라는 감수성으로 인체와 인간을 변형시키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빈센트 반 고흐가 감성적, 감각적 관찰의 작가였다면, 나는 분석적, 객관적 관찰 쪽에 가까웠죠.”
인체에 대한 분석적 태도는 형태를 넘어, 형태로 보이게끔 만드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갈망에 닿았다.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이용덕은 “인체를 다룰 때 그 인체에서 느끼고자 하는 것이 단순히 형태만은 아니다”라면서 “형태 속에 깃든 생명감 혹은 그 어떤 순간이 가지고 있는 시간적인 응축 같은 것들을 좀 더 느끼면서 만들고자 했다”고 자신의 20대를 회고했다. 순간성이 갖는 영원성’이 그의 중요한 화두가 됐다. 향(香)이 짙으면 형(形)이 잘 보이지 않는다. 내용이 앞서면 형식이 안 보인다는 생각에 ‘일상의 순간’을 택했고, 그 순간이 갖는 정체성에 몰두했다. “객관적인 객체로서, 인체를 두고 어떻게 보여지는지에 대한 형식을 연구”하며 1980년대를 보냈다. 인체를 소재로 선택했을 뿐 실상 그의 작업은 개념미술에 더 가까웠다.
“힘을 가해 나타나는 변형과 흔적은 물리적인 현상일 뿐이지만, 그 같은 조형적인 결합이 제3의 상상이나 해석을 불러 일으키는 화학 결합으로서의 조각을 시도하기도 했고요.”
그러던 이용덕은 대한민국 미술대전, 즉 ‘국전(國展)’의 후신인 전국 단위 공모전에서 2년 연속 큰 상을 받았다. 1986년 제5회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우수상을 수상했다. 당시 대한민국은 모든 국민의 해외 여행이 제한되어 있던 시절이었는데, 최고상인 대상 수상자에게만 견문을 넓힐 수 있는 해외여행의 기회가 부상으로 주어지는 것이었다. 이 혜택이 도전의 유일한 이유였다. 그걸 놓친 게 아쉬워 이듬해 또 출품했다. 작품을 제출하러 가던 날 우연히 마주쳤던 친구, 조각가 류인(1956~1999)이 “너 왜 또 내냐? 우수상도 탔으면서”라며 핀잔 같은 농담을 던진 게 기억난다. 바로 그 1987년 제6회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이용덕은 조각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대상을 받은 작품 ‘기념촬영’은 5명의 소녀가 등장하는 실제 기념사진을 토대로 했습니다. 사실적인 기법으로 인체를 제작했고, 사진임을 암시하는 프레임으로 인물들을 에워쌌습니다. 그 결과로 실상(實像)이 허상(虛像)인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됐죠.”
소녀들을 조각한 것이라기보다 소녀들의 순간을 조각했던 것이다.
구상조각의 탈출구 현∙상전(現像展)
1980년대 중반, 정확히는 1986년부터 1991년까지의 조각가 이용덕이 매년 빠짐없이 참가한 동인전(同人展)이 하나 있다. ‘현∙상전(現像展)’이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 1980년대 대한민국의 시대상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눈부신 경제 성장 이면에서는 군사 정권에 대항하는 민주화 열망, 노동운동의 확산과 함께 사회 정의를 요구하는 시민의식이 확대됐다. TV보급의 확산으로 대중문화가 발전했고, 서구 문화의 유입과 함께 다양성이 증가하고 있었다. 경제성장의 폭만큼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진일보하는 중이었다.
반면 이 시기 미술계는 상대적으로 경직돼 있었다. 지금은 ‘단색화’로 통칭되는 단색조(모노크롬주의) 추상미술이 1960년대 이후로 전위(前衛)예술의 자리를 독점해 왔다.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두렁’ ‘현실과 발언’ 등의 동인을 위시한 민중미술이 급성장하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개인적 관념 세계를 추구해온 모더니즘의 추상미술과 예술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한 민중미술은 물과 기름처럼 겉돌았다. 추상미술 계열은 모더니즘의 엘리트적 경향이 두드러졌고, 민중미술은 의도적으로 거칠고 조악한 기법을 추구했다. 사회 이슈에 참여하는 내용을 전달하는 목적에 따라 형성된 특징이라 볼 수 있다. 즉, 1980년대 중반 이 두 진영의 대립 속에서 30대 젊은 작가들이 목소리를 내고자 한 것이 ‘현∙상전’이다.
“여기 모인 그림과 조각은 1970년대 이후 현대미술의 커다란 흐름 속에서도 나름대로 오늘에 대한 해석을 지니면서, 어떠한 이념이나 양식에 쉽게 구획되거나 편승하지 않은 채 저마다의 독자적인 시각을 보여온 것들이다. 보다 기계적이고 자동화된 오늘날에 있어서 예술은 손의 체온을 거쳐 만들어지는 마지막 보루일지도 모르기에 더욱 더 그림처럼, 더욱 더 조각처럼 보여야 되고 그만큼 손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절실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 오늘(現)의 모습(像)을 깨닫고 드러내 주는 사고와 방법은 다양하겠지만 여기 모인 작품들은 형상이라는 하나의 공통된 시점(視點)에서 저마다의 사고를 보여주고 있다.” (1986년 6월25일 관훈미술관에서 개막한 ‘현∙상전’ 동인 선언문)
‘현∙상전’ 참여작가들을 향해 미술평론가 정병관은 “이들을 자유주의 화가들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 이유는 이들이 어떤 유파나 예술운동 같은 단체적 활동에 약한 인상을 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어떤 유파에도 속하지 않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 같기 때문[1]”이라고 했고, 오광수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은 “개념적 사유와 미니멀리즘의 표현이 풍미했던 1970년대 후반의 주류와는 거리를 두며, 시각적 해방을 서둘렀던 젊은 작가군∙∙∙이들은 목적의식을 앞세운 급진적인 내용주의 보다는 새로운 시각으로서의 현실을 향한 정직한 접근과 개념적 사고에서 벗어난 표현의 회복에서 자신들의 방법을 가다듬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2]고 평가했다. 평론가 이일의 경우는 “‘형상성’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 외엔 어떤 일괄적인 공통점을 부여하기 어렵다”고 여겨지는 이들 작가들에 대해 “1980년대는 1970년대의 어떤 단일한 통일성의 지향보다는 복합적이고 다원적인 특성을 띄고 있다”라는 말로 한국 미술계의 폐쇄성을 극복하고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려는 시도를 격려했다. 30여 참여작가들의 방법론을 일일이 분석한 미술평론가 김복영은 “’현∙상’의 작가들은 개인의 관심으로부터 사회의 관심에 이르는 제 관심들에 대응하는 상황(situation)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상황적 시각이란 ‘인간은 상황적 존재’라고 할 때와 같이 본질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본질에 앞선 상황에 주목함으로써 본질을 더 잘 포착하여 그려 보일 수 있다는 것으로 표현된다”면서
“상황에 내재하는 본질에 대한 ‘인간적 개입(人間的 介入)’이자, 본질이 상황에 ‘내재(內在)하는’ 것으로, 비로소 이들은 상황의 현상들의 이모저모에 자신의 인간적∙사회적 관심까지를 개입하여 거기서 감지되는 형상들을 가지고 세계의 본질적 상황을 서술하고 있다”[3]고 평했다.
하나의 공통점으로 수렴되지 않는 현·상(現·像)전의 작가들을 굳이 구획해야 한다면 ‘엘리트 이단아’라는 이름으로 묶을 수 있다. 당시 주류였던 추상회화와 추상조각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추상 화단에서 빠져 나오고자 꿈틀댔던 이들이기 때문이다. ‘예술을 위한 예술 운동(Art for Art’s Sake)’의 흐름 속에서 태동한 20세기 아방가르드와 추상미술의 예술가들은 점점 더 현실에서 멀어진 반면 민중미술은 보통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현실과 관계 맺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정치∙사회적 이슈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기에 당시 젊은 작가층에게 큰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작가 다수가 민중미술로 즉시 투신하는 것은 아니었다. 민중미술의 경우 미학적 완성도보다는 대중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참여∙모방하며 그릴 수 있는 표현과 형식을 택했다. 사회∙정치적 목적과 내용을 담기 위해 미술 본연의 가치를 희생하고 퇴보하게 하는 점을 부정적으로 여기는 경우도 있었다.
마지막 ‘현∙상전’에 참여했던 1991년 그 해 이용덕이 독일로 떠난 것은 숙명적 선택이었던 것 같다. 그는 돌파구를 갈구했다. 유럽의 여러 나라 중에서도 냉철한 사유의 조건을 강조하고 객관적 관찰을 중시하는 독일을 택했다.
실존과 순간의 발견
1992년 3월. 독일 베를린에 도착한 이용덕이 유학생으로서 적응기간을 보내던 어느 늦은 봄의 일이다. 혼자 작업실에 앉아 커피를 마시던 중 문득 이런 마음이 들었다.
‘오늘부로, 이 순간부터 내가 이 세상에 새로 태어났다고 치자. 이제 내가 하는 것을 작업이라 하지 말고, 내가 만드는 것을 작품이라고 부르지 말자. 그냥 내가 궁금한 걸 실험해 보는 것이라고 하자. 그걸 사람들이 전시장에 가져다 놓고 작품이라고 부르는 것까지는 내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나 자신은 작품이라는 생각을 갖고 임하지는 않겠다.’
감았던 눈을 떴다. 천천히 주변을 돌아봤다. 처음 세상에 태어난, 아무것도 모르는 존재로 사물을접했다. 구석에 놓인 각목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대략 3m 정도 길이에,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막대기였다. 다가가 그것을 집어 올렸다. 긴 나무막대가 툭 기울어졌다. “이게 뭐지?”라는 궁금증에 “왜 기울지?”라는 호기심이 더해졌다. 당연하게 여겼던 상식과 지식은 애써 생각하지 않았다. 이리저리 더듬듯 만지작거리다 어디로도 기울지 않고 똑바로 들 수 있는 무게 중심의 지점을 찾았다. 느릿한 일련의 과정에서 의외의 긴장감을 느꼈다.
끈을 찾았다. 긴 끈으로 각목의 한가운데를 묶어 천장에 매달았다. 바닥에서 10cm 정도 뜬 채 수평으로 매달린 막대 하나가 고요한 긴장감을 만드나 싶더니 서서히 돌기 시작했다.
“시간과 공간을 내 눈으로 목격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 전 까지만 해도 나는 시간과 공간을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매달린 각목 하나가, 변화하는 시간성과 바뀌고 있는 공간을 내 앞에서 펼쳐 보였습니다. 그간 내가 매달려 온 예술관 혹은 가치관이 한 순간 무너져 내렸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예술이란 영원성을 가져야 하고, 철학적 깊이와 가치를 지녀야 하며, 고상한 인간의 지성적인 어떤 것을 지배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거든요. 하지만 바로 그 순간을 ‘감각’하는 ‘순간성이 가지는 완벽함’, 순간이 갖는 긴장감과 그 긴장이 뿜어내는 영원성과 영속성을 체감했습니다.”
이 날의 경험 이후 작가는 관념적 의도가 지배적인 고전적인 기념비적 조각에 대한 몰두에서 벗어났다. 일상을 포착한 사진, 순간을 잡아낸 스냅사진에서 발견한 인물이나 장면을 작품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순간과 감각의 가치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1986년작 청동조각 ‘올림픽의 매혹’에 등장하는 달리는 현대인과 서울대병원 암센터 앞 설치작품인 2011년작 역상조각 ‘아름다운 사람들’ 속 자전거 타는 여성은 옷자락 휘날리는 동세가 외형적으로 언뜻 비슷하게 여겨진다. 하지만 ‘올림픽의 매혹’에서는 올림픽이라는 승리적 상황에 대한 의도를 담아 기념비적(monumental)인 위대한 순간을 가로지르는 도시인을 표현한 반면,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누구인지 모르고 누구이어도 좋을 여성은 언제인지 상관없고 언제이어도 괜찮을 순간을 관통하는 중이다. 후자의 경우는 순간을 포착함으로써 영속적인 순간을 확보한 것이다. 형식적으로는 크게 달라진 것 없는 듯하나 내용상의 변화가 극적인 두 작품이다.
순간의 영속성을 포착하는 일, 동시에 그것을 감각하고 감지하는 인지적 쾌감이 작가를 감쌌을 것이다. 이후로 이용덕의 작업에서는 순간성이 중요한 화두가 됐다. 보편성이나 관념보다도 더 진실된, 감각적 순간의 진실함이 자리 잡았다.
돌이켜 보자면 이용덕이 1987년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조각 부문 대상을 수상한 작품 ‘기념촬영’도 사진 속 순간성에 대한 내용이었다.
“매 순간은 쉬지 않고 과거로 사라져갑니다. 지금도 수없이 많은 순간이 과거로 사라졌습니다. ‘과거’란 거대한 벽 뒤로 사라져버려 더 이상 볼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사진을 찍어놓는 일은 그 벽에 창문 하나를 뚫어놓는 것이라 할 수 있어요. 현재의 나는 그 창문을 통해 과거로 사라져 간 어떤 순간을 내다볼 수 있는 것이죠.”
작가는 사진에 대한 자신만의 개념 정의를 새로 했다. 하지만 사진의 실제적, 물리적 정의는 좀 다르다.
“사진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사진이란 인화물질이 얼룩을 묻혀 형상을 이룬 종이입니다.눈은 그것을 보았으나, 우리가 진짜 본-봤다고 여기는-것은 그 종이 너머로 과거에 이 사진이 찍힐 당시의 바로 그 순간입니다. 즉 우리는 사진을 통해 과거의 그 순간을 본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엄연히 우리는 여기 현재에 있고, 과거는 계속 창문 너머에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시간의 단면과 실존의 본질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창문’ 밖에 있는 과거의 존재들을 우리와 같은 현재의 이 시간대로 옮겨올 수는 없을까?
벼룩시장에서 찾은 사진 속 33명의 소년들
독일에서 탄생한 이용덕의 대표작 중 하나는 “kl.k.7d.24.10.1920 Berlin”이다. 테라코타로 만든, 키 130cm 정도의 소년 조각상 33점으로 이뤄진 작품이다. 결과적으로는 인체 조각이지만 개념의 층위가 두터운 작업이다.
동네 벼룩시장은 유럽의 주말 일상 중 하나다. ‘영속적인 순간’에 대한 개념을 품은 그는 플로막트(Flohmarkt)라 불리는 벼룩시장을 돌며 사진을 찾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초등학교 입학식 기념으로 찍은 듯한 사진 한 장을 발견했다. 33명의 남자 어린이들이 등장하는 사진의 뒷면에는 ‘1920년 10월 24일’이라는 날짜와 함께 아이들의 이름까지 하나하나 적혀 있었다.
“예닐곱 살로 보이는 아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이 한창일 때 태어나 빈곤한 환경에서 자랐을 테죠. 1차 대전 이후 베를린은 말 그대로 ‘폐허’ 였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1920년 입학식 사진 속 남학생들은 거의 영양실조로 보일 만큼 바짝 말랐어요. 안쓰럽기 짝이 없죠. 이 순간보다도 더 안타까운 일은 이 아이들이 훗날 20대가 되어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독일군이 되는 바로 그 소년들이라는 사실이지요. 이 중 몇은 전쟁에 나가 죽었을 수도 있지만, 이들 중 어떤 이는 누군가를 죽이거나 악행을 저질렀을지도 모릅니다. 이 중에 유태인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이들 중 누군가가 살아 남았다면 무너져버린 독일을 재건하는 일을 했을 수도 있고요.”
사진 한 장에는 그것이 촬영되기 이전의 시간들은 물론, 그 이후 수십 년을 관통하는 역사까지도함께 담겨 있었다. 또한 그것은 먼 나라 남의 이야기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벼룩시장에서 발견한 사진 속 서른 세 명의 소년들은 꼭 내 아버지 같은 세대였습니다. 1917년생인 아버지는 일제시대에 태어나 핍박 받았고, 한국전쟁을 겪었으며, 찢어지게 가난하던 대한민국이 오늘날의 모습으로 성장하기까지 고생만 한 세대입니다. 그래서 마음 먹었습니다. 이 아이들을 현재로 데려오리라.”
사진으로 존재하는 과거의 아이들을 현재로 데려온다는 것, 즉 현존을 이뤄내기 위한 조각가의 선택은 “물질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얼굴은 사진을 유심히 관찰한 후 하나하나 석고로 조각했다. 몸통은 동일한 틀을 이용해 테라코타로 찍어냈다.
“똑같은 교복 속에 갇혀 있는 사진 속 아이들은 국가의 방향성에 입각한 교육을 받고, 그 틀 안에서 성장해 독일군이 됐을 겁니다. 일종의 프로파간다 같은 교육의 영향을 받은 아이들이라는 점을 보여주고자 같은 틀에서 나온 똑같은 몸통을 부각시켰습니다.”
중요한 건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다. 작업을 하며 읊조렸던 “너희의 미래를 알겠니?”라는 질문들, “너희가 무슨 죄냐, 훗날 얼마나 지독한 일을 저질렀건 그것은 히틀러 치하의 독일이라는 역사적 특수성에 의한 업보였단다”라는 탄식 같은 다독임이 인물상에 배어들었다.
그가 유학 한 베를린 예술종합대학을 비롯한 미술학교들은 일년에 한 두 번씩 스튜디오를 개방한다. 인근 주민부터 미술 관련 전문가들과 지역 언론들까지 방문해 작업을 돌아보곤 했다. “kl.k.7d.24.10.1920 Berlin”이 될 조각상 33점 연작 중 20점 가량 만들었을 무렵 오픈 스튜디오가 진행됐다. 그의 작업실로 정장차림의 남자 셋이 들어왔고, 그들은 의외로 제작 중인 아이들 조각 앞에서 한참 토론하며 떠날 줄을 몰랐다. 다음 날 지역 방송사 취재진이 찾아와 대서특필됐고, 베를린 슐뮤지엄(SCHULMUSEUM) 전시로 이어졌다.
전시를 열고 작가는 사진 속 소년들 중 생존자를 찾는 작업도 함께 진행했다. 이제 80대가 되었을 할아버지들을 만약 찾게 된다면, 현재의 그 모습을 조각으로 만들어 33명 소년상(像)의 옆 전시실에 세우고자 했다. “‘현재로 온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새긴 현재’를 통해 2개의 현재라는 방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떴다. 만약 1명이라도 찾아진다면, 전시장에서 직접 현재의 모습을 제작하는 과정까지 전시가 된다는 계획이었다.
라디오 방송과 신문 기사를 보고 기적처럼 전화가 여러 곳에서 왔고, 적어도 3명 이상의 생존자가 있음을 확인했다. 하지만 이내 연락이 두절됐다. 아마도 세간의 조명을 받게 될 경우, 밝히고 싶지 않은 과거까지도 공개되어야 한다는 점이 부담스러웠을 것이라 짐작하며 마음을 접었다.
“이 작업의 목적은 사진 속 과거가 된 현재를 ‘물질을 부여’함으로써 현재로 끌어오는 ‘지속적인 현재’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것이었습니다. 실험을 통해 얻어낸 것은, 허상처럼 보이는 부(不)존재를 통해 존재의 흔적을 확인했다는 점입니다.”
독일에서의 소년상 연작을 통해 이용덕은 존재와 부존재 사이의 중간 지점에, 마치 ‘사진’처럼 계속 현재로 존재하는 인물의 모습을 저장하는 개념을 구축했다. 음각으로 움푹 패인 부존재를 통해 존재를 보여주는 그의 ‘역상조각’을 관통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는 인간의 실존을, 그 순간성 속의 영원성을 구현한 그 작업의 결정적 계기가 독일에서 더욱 확고해진 것이다.
실루엣과 존재의 양면
한국으로 돌아왔다. 존재와 부존재, 존재했으나 이제는 사라져버린 것들에 대한 천착은 귀국 후에도 지속됐다. 2000년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미술관에서 열린 귀국 보고전을 겸한 개인전의 제목이 ‘존재의 양면에서’인 이유다. 축광안료를 이용한 일명 ‘그림자 조각’과 MDF합판을 쌓아 만드는 ‘실루엣 조각’이 이 전시의 대표작이다.
전시장 중 한 방은 직경 6m의 원형 암실로 조성됐다. 관람객이 들어서는 순간 센서에 의해 투광기가 켜지고 회전하며, 강렬한 빛이 사람의 뒤를 쫓아 선명한 그림자를 벽에 만들어낸다. 작품은 바로 이 그림자다. 관객이 움직여도, 그림자만 그대로 남아있다. 소설 ‘피터 팬과 웬디’ 속 주인공 피터 팬이 그림자만 남기고 떠나버린 장면 같은 흥미로운 광경이 펼쳐진다. 관객이 떠나도 그림자는 자리를 지키지만, 방이 다시 어두워지면서 그림자는 사라진다. 비밀은 축광안료이고,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축광안료는 빛이 있을 때 빛을 머금고 있다가 어두워졌을 때 서서히 빛을 내뿜는다. 이를 벽에 발라두고 빛을 비춘 후 다시 방을 어둡게 하면, 관객의 그림자가 드리운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벽면들이 빛을 흡수하고 축적했다가 밝게 빛난다. 즉, 그림자가 남아있는 게 아니라 그림자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주변부가 환히 밝아져 마치 그림자가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는 원리다. 시간이 지나 ‘그림자가 없어졌다’고 하는 것도 실상은 그림자가 사라진 게 아니라 밝았던 주변부가 다시 어두워진 것이다.
‘그림자 조각’ 또한‘역상조각’과 같은 이치다. 역상조각을 보는 관객은 비워진 부존재를 존재인 양 인식하고, 그림자 조각의 관람객은 그림자의 실루엣을 의식하지만 실은 주변부의 밝음이 만든 상대적 어두움의 그림자였던 것이다.
‘실루엣 조각’도 마찬가지다. MDF 판을 수백 장 쌓아놓고 양쪽 끝에 인물 형상의 테두리를 그린다음 톱으로 인체에 해당하는 부분을 잘라냈다. 층층이 쌓인 합판에서 마치 인물이 밖으로 빠져 나간 듯한 실루엣 조각이 완성됐다. “사람이 서 있다” “얼굴이 보인다”고 하지만 관객이 보는 것은 그것이 없어진 부존재의 자리이며 그 주변부가 부존재의 흔적을 증명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역상 조각의 중국 진출
작가 이용덕의 시그니처가 된 ‘역상조각’은 2003년을 기점으로 널리 알려졌고, 2004년 서울시립미술관의 서울 미디어시티 비엔날레에서도 주목을 끌었다. 음각이 양각처럼 보이고 빈 공간이 꽉 찬 듯한 착시를 일으키며, 음과 양(陰陽), 허와 실(虛實)이라는 동양 사상부터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불교철학까지 구현했기에 보는 재미와 곱씹는 개념적 의미를 두루 충족시켰다.
작가 손을 떠나간 작품이 스스로 인연을 만들기도 한다. 해외 아트페어에 출품된 이용덕의 ‘역상조각’을 본 중국 국립미술관 관장이 깊은 관심을 가졌다. 펑 위안(Feng Yuan)은 중국 유일의 국립미술관인 중국미술관(NAMOC)의 관장인 동시에 중국미술가협회 부주석으로서 중국 내 영향력이 상당했다. 펑 관장의 초청으로 기획된 2005년 11월 베이징 중국미술관에서 개막한 이용덕 개인전 ‘그림자의 깊이(Depth of Shadow)’는 외국작가 전시로는 이례적인 규모였고 화제를 모았다. ‘중국 내 미술 한류(韓流)’라는 언론의 호평도 이어졌다. 당시 베이징 전시 이후 마카오, 상하이 등으로 미술관 전시가 이어졌고 결과적으로 이는 한국미술계가 2006~2007년을 전후로 대거 중국 진출을 결심하는 촉발제 중 하나가 됐다.
그 전까지만 해도 ‘네거티브 조각’ ‘움직이는 조각’ ‘착시조각’ 등으로 불리던 이용덕의 작업이 ‘역상조각(Inverted Sculpture)’이라는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된 것도 중화권 순회전이 열린 이 시기 일이다. 2006년 3월부터 5월까지 개인전이 열린 마카오 국립미술관의 큐레이터가 개막 행사에서 “이용덕의 조각을 칭하는 여러 이름들은 모두 적합하지 않다. ’주역’에 쓰이는 바뀔 역(易) 자가 순환의 의미를 가지므로, 있었다가 없어지고 없었다가 다시 나타나기도 하는 작업 전체의 개념을 포괄할 수 있는 ‘역상’이라 부르는 것이 적합하다”며 ‘역상조각(Inverted Sculpture)’의 명칭을 제안했다. 이는 당시 현장에 있던 평론가들과 언론인들의 전폭적인 공감을 얻었고 이후 ‘역상조각’이 통용되기 시작했다.
이용덕이 참여한 초기 공공미술
미술관 밖에서 만나는 예술작품은 좀 더 반갑고 친근하다. 이용덕의 작품들을 종종 공공미술로서 마주할 수 있다. 강남구 대치동 소재 삼탄빌딩을 35년째 지키고 있는 ‘의지(意志)의 빛’은 이용덕의 공공미술 첫 작품이다. 1987년 국전 조각 부문 대상을 수상한 이듬해, 에너지기업 삼척탄좌로부터 신축 예정인 사옥 앞에 설치할 조각상에 대한 의뢰를 받았다. 기업의 정체성과 지향을 연구하며 삼척 탄광까지 다녀왔고, 사옥이 준공된 1991년에 맞춰 작품이 공개됐다. 활처럼 등을 젖힌 건장한 두 남성의 몸이 마치 커다란 두 날개인 양 대칭을 이룬다. 형제처럼 양쪽에 배치된 두 청년은 삼척탄좌의 공동창업주 유성연∙이장균 회장을 의미한다. 추상조각과 구상조각인 인체가 결합된 것인데, 기하학적인 선형 배치를 통해 갱도를 향해 들어가는 수렴의 이미지와 그곳에서 캐낸 에너지를 원천으로 확산하는 빛의 이미지를 동시에 표현했다.
종교미술 또한 이용덕에게서 떼 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그는 20대 때 ‘루가’라는 이름으로 천주교 세례를 받았다. 명동성당에서 인연을 맺은 조학문 바오로 신부가 서울 공항동성당으로 부임해 성전 신축의 임무를 맡게 됐다. 건축설계를 고민하는 조신부에게 이용덕은 파리 유학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건축가 정기용(1945~2011)을 소개했고, 1988년 공항동성당이 완공됐다. 그 인연으로 이용덕은 공항동성당의 주보 성인이자 나눔과 청빈을 실천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인상을 제작했다. 비둘기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며 대화하는 모습으로 소통과 베풂을 강조했다. 성모상도 만들었다. 성모 마리아가 예수의 축 늘어진 시신을 안고 있는 ‘피에타상’은 지극히 전통적인 모습으로 빚은 반면 성당 마당에 선 성모상은 마치 시골처녀처럼 소박하게 만들어 친근함을 더했다.
경기도 성남시 분당성요한성당의 십자가와 제대 위 성령상이 이용덕의 작품이다. 신도시건설에 따라 1994년부터 건립되기 시작해 2002년에 준공, 2003년부터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한 이 가톨릭 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과 현대건축을 결합한 웅장한 형태부터 눈길을 끌고, 규모로는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예술이 깃든 성당으로 유명한 이 곳의 핵심 미술품을 이용덕 작가가 맡았다. 구릿빛 십자가에 매달린 2001년 작 황금빛 예수는 두 팔을 벌려 하늘을 향한 부활 승천상이다. 보통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가 고개를 떨구고 몸을 축 늘어뜨린 고통의 모습으로 표현된 것과 달리 부활하는 예수의 모습을 구현해 희망적이다. 제대 위 반원형 박공(pediment)에 새긴 폭 6m의 성령상도 함께 제작하였다. 성령을 상징하는 비둘기 형상과 성령을 둘러싼 십자가 형태의 빛, 7가지 성사를 상징하는 일곱 개의 흰 빛살이 표현돼 있다.
김수환 추기경의 모습도 여러 점 제작했다. 김 추기경이 생전에 설파한 “서로에게 밥이 되어 주십시오”를 묵상하며 역상조각 기법으로 만든 흉상은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가톨릭대 성심교정에 기증했다. 명동성당 서울대교구에 가면 선종 1주기를 맞아 역상조각으로 제작한 김수환 추기경 전신상을 만날 수 있다.
한편 서울시 동작구 상도동 숭실대학교에는 학교 상징 동물인 백마(白馬) 한 무리를 흰 대리석에 새긴 ‘백마도약상’(1991)이 있다. 총 길이 17.5m에 높이가 4.7m, 두께는 1.5m 규모인데, 이태리 피에트라 산타에서 캐낸 대리석으로 제작한 조각이다. 전진, 도약, 상승을 박진감 있게 표현한 백마 군상은 부조에서 점차 환조로 변모하는 형식으로, 백마가 대리석에서 빠져나와 질주하다 비상하는 듯한 극적인 장면을 이루고 있다. 뛰어난 묘사력과 역동적 구성력을 자랑하는 이 작품의 제막식을 끝낸 직후, 이용덕은 독일 유학길에 올랐다.
인물상에 담론과 인격을 담아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의 용산구청 앞을 지나다 보면 푸른 인물 입상(立像)이 우뚝 서 있다. 뻔한 기념비적 인물 입상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손가락 한 뼘 남짓한 작은 인물상들이 빽빽하게 모여 거대한 인물 하나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은 작품 가까이 다가서야 비로소 인지할 수 있다. 제목 ‘호모날리지언(Homo Knowledgian)’은 자신의 지식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21세기 정보화 사회의 신지식인을 지칭하는 용어다. 과거에는 역사를 이끄는 위대한 거인이 있었다면, 21세기 함께 만들어가는 미래이며 집단지성의 가치가 중시된다는 점을 강조한 작품이다. 감히 ‘21세기형 군상조각’이라 부르게 되는 이유다.
유명인을 기리는 조각을 제작하고자 이용덕에게 역상조각을 의뢰하는 것은 참신한 시도였다. 서울 종로구 관훈동 관훈클럽 신영기금회관 로비에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와 그의 동생 정신영 기자의 형제상(2007)이 서 있다. 관훈클럽 50년과 신영연구기금 30주년에 맞춰 제작된 작품이다. 당초 관훈클럽 신영연구기금 측에서는 프랑스 등 외국의 유명 조각가에게 의뢰할 계획으로 작가 리서치를 진행하던 중이었으나 우연히 이용덕을 알게 됐고, 수 차례 논의 끝에 한국의 젊은 작가에게 과감히 작업을 맡겼다. 이곳에는 역상조각인 정주영∙정신영 형제상 외에 정신영 흉상도 있다.
서울아산병원 내 정주영기념관 입구에 설치된 ‘아산 부부상’(2015)은 1960년대 촬영된 사진 한 장을 기반으로 부부의 다정한 순간을 살려낸 역상조각이다. 작품 앞에서 관람객이 움직일 때마다 아산 정주영 회장이 부인 변중석 여사를 지긋이 바라보는 듯, 변 여사가 남편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듯 각기 다른 장면을 보여준다.
포항제철 창업자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1주기를 기념해 서울 강남구 대치동 포스코센터 1층 로비에 설치한 ‘박태준 전신상’(2012)은 높이가 4m에 달하는 대형 역상조각이다. 생전 박 명예회장이 평소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중절모와 양복 차림에, 관람객의 시선을 따라가며 건물 구석구석을 돌아보는 듯한 구성이 인상적이다.
인물의 정신을 한 장면에 응축한 위인상
역사적 인물을 조각상으로 남기는 일은 작가 이용덕을 더욱 고민하게 만들곤 했다. 그의 작업은 누구여도 상관없는 평범한 사람을 대상으로, 순간성을 그려낸다.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암센터 앞에 설치된 자전거 타는 인물 이미지의 역상조각 ‘아름다운 사람들’(2011)이 대표적이다. 옛 추억을 간직한 흑백 사진을 오려 세운 듯 아련한 감성이 심리적 환기를 불러오는 작품이다.
반면 인물 기념조각은 ‘모뉴멘탈(Monumental)’한 그 이름처럼 특별한 누군가를 오래도록 기억하게 하는 영원성을 특징으로 한다. 2010년 서울시 남산 안중근의사기념관 앞에 건립된 안중근 동상이 그 중 하나다.
서울시가 진행한 안중근 의사 동상 재건 공모에 이용덕이 당선됐다. 한 위인의 업적을 한 점의 조각상으로 만드는 일은, 한 사람의 삶을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것 이상으로 어려운 일이다.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던 안중근의 얼굴은 고문으로 붇고 일그러져 초췌하게 왜곡된 옥중 사진을 근거로 한 모습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번 동상을 통하여 결연하게 독립을 위한 저항의 의지를 드러나는 모습으로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안중근 의사의 ‘대한국인’으로서 갖는 애국정신을 표출하고, 더불어 무력을 앞세운 일본의 침략을 준엄하게 질타하는 대한제국의 장군으로서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였다. 조국의 침탈을 막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희생하는 안중근 의사의 참모습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관한 것이었다.
남산에서 만나는 이용덕의 안중근 동상에는 '정중동(靜中動)'의 미학이 담겼다. 지나치게 극적이고 동적이기보다는 내면의 정신성을 담아내기 위해 조용하면서도 강력한 움직임을 포착했다. 비폭력을 강조한 ‘동양평화론’의 안중근이 악(惡)의 처단이라는 대의명분 아래 결단을 실행하기까지의 깊은 내면과 정신적 결의가 한 장면으로 표현된 셈이다. 조각가는 안중근이 품에 간직했던 태극기를 꺼내 들어 펼치는 장면을 택했다. 그 결과 총격 직후 안 의사의 긴박한 순간성이 마치 슬로우 모션으로 보는 듯 동작이 단호하면서도 유려한 움직임의 느낌으로 고정되어있다. 총을 사용해서라도 그가 얻고자 한 조국 해방, 평화의 염원을 담은 준엄한 춤사위와 같다.
이용덕은 순간적인 찰나를 포착하는 작업을 통해 영원성과 시간의 축적을 표현하는데 주력해 왔다. 일상의 한 장면 속에서도 깊은 의미를 담아내는 그의 조각적 접근법은 특정인물을 묘사할 때 더욱 입체적인 해석으로 확장된다. 역사적 인물의 조각에서는 단순한 순간의 포착이 아닌, 그 인물이 이룬 업적과 정신성을 총체적으로 아우르는 종합적 모습으로 표현한다. 그는 개별적인 순간의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동시에, 시대적 맥락과 정신을 담아 인물의 본질을 재현하는 데 몰두했다. 이러한 태도는 그의 조각이 단순한 형상의 재현을 넘어, 깊은 철학적 사유를 담은 예술로 승화되도록 이끌었다.
지난 2023년 서울 용산역 광장에 위치한 ‘ROKAUS(로카우스) 앞에 높이 8.2m의 작품 ‘위대한 결집’을 세웠다. ‘실루엣 조각’기법의 작업에 속하는데, 금속막대를 성냥 쌓기 하듯이 4방향에서 단순히 쌓아 올리는 방법만으로 제작한 것이다. 4개 면을 이루며 쌓여 실루엣으로 차려자세부터 경례자세까지 국가와 겨레에 충성하는 국군 장병의 호국정신을 표현해냈다. 빛과 시선의 변화에 따라 입체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며 ‘역상조각’과 ‘실루엣조각’이 결합된 새로운 시도를 선언하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는 옹골찬 작업개념을 중심에 두고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모색하는 작가의 바로 지금 모습이기도 하다.
필자 소개:
조상인은 서울대학교에서 고고미술사학 학사, 예술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경제신문 미술 전문 기자로 활동 중이며 백상예술정책연구소 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또한 문화재청 산하 무형문화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최근 저서인 『살아남은 그림들』을 통해 한국 근대 미술의 숨겨진 이야기와 그 유산을 탐구하고 있다.
[1]정병관, 「‘現∙像’ 창립전에 부쳐」, 『관훈미술관 기획 현∙상 전 도록』, 1986년
[2]오광수, 「현실을 향한 정직성과 의식의 차가움」, 『그로리치화랑 기획 현∙상‘87전 도록』, 1987년
[3]김복영, 「상황, 현상, 그리고 다시 형상적 서술로」 『갤러리현대 기획 현상 ‘88전 도록』, 1988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