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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예찬, 그리고 네거티브(Negative)의 미학과 인식론

심상용 (동덕여대교수, 미술평론)

“그들은 미지의 신비로 다가오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나는 타인들 사이를 걷는다.” (이용덕)

 

“삶이란 더러운 것이다. (Das Leben ist eine missliche Sache...)”

쇼펜하우어가 내뱉었던 생의 정리였다. 그런가? 조각가 이용덕은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어느 곳에서 어떤 식으로 마주하건 삶은 아름답다는 것, 따라서 이방의 거리 익명의 지나침에서 조차 생의 미학이 부인되어선 안 될 거라는 게 이용덕의 입장이다. 어떤 경우건 ‘살아있음’의 경이로움을 느끼는데 조건이 달려서는 안 된다는 점, 그리고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도 영혼의 동기가 된다는 점, 이것이야말로 이용덕으로 일하게 하는 동기가 된다. 

 

이용덕의 인물 중 정지해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특히 그들은 하나같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다. 이 다가옴, 나를 향한 신체적 접근은, 비록 한 순간 지나쳐 갈 것이더라도 어떤 분명한 소통의 성취로 나아갈 것이다. 생각해보라. 그들은 오히려 이 잠시의 스쳐감에 의해 나의 해석에 연 연하지 않으면서, 즉 타자의 해석에 자신을 조응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롭고 독자적인 상태로, 따라서 자신의 방식과 스타일을 양보할 필요 없이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다. 다가옴과 교차의 찰나는 대기의 경미한 파동을 통해 갑작스럽게 존재감에 휩싸이게 만드는, 매우 본성적인 교감의 요인이자 직관적 소통의 한 유형이다. 이렇듯 절반의 단절, 절반의 소통으로 자신의 연출되지 않은 짧은 흔적을 남기고 사라지는 것들이 그토록 생의 의지를 북돋울 수 있다니! 이용덕은 그렇게 자신의 인물들로 우리에게 향하도록 하고 있다.

 

이용덕의 이 다가오는 인물들은 사라져가는 것들 중에서 선별된 ‘구제된 사라짐’의 의미를 지닌다. 그들은 현재 한 장소에 있지만, 이전엔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를 걸었던 이들로써, 우주적 시간주기대로라면 이미 사라지고 없어져야 했을 사건들이다. 작가는 이 상이한 진실들을 기적적으로 생존시키고 한 데 모아둠으로써 일상의 서사적 차원을 환기시키고, “자의식과 페르소나 (Persona)“의 통시적 네러티브를 보여주고자 한다.

 

이 같은 구체성으로부터의 모음 방식이 지니는 또 다른 의미는 현상에서 멀어지고자 하는 사유의 욕망에게 다시 “여기서부터”라고 단호하게 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존재론을 공허한 메타담론의 허공에서 다시 실재의 대지로 끄집어 내리는 것이다. 작가가 여전히 흙을 사용하는 것은 이런 점에서 더욱 의미롭다. 그의 소조야말로 존재론에 신체를 부여하고, 살과 뼈를 공급한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의 사실주의도 이의 연장선상이다. 그 역시 존재의 생동감을 “있는 그대로, 불필요한 과장이 나 왜곡 없이” 보여주는 방식인 것이다. 사실 외의 어떤 장식이나 추상화(抽象化)도 이 같은 이용덕의 의도에 반목을 초래할 수 있다. 알다시피 장식은 현실에 대한 불만에서 태동하는 것이고, 추상은 사실을 견고히 하기 보단 제거하는데 더 효과적인 방식이다. 그렇다면 일련의 사진적 리얼리즘은? 그것은 그 과도한 지시성에 의해 최소한의 상상력조차 억압하는 쪽으로 나아갈 확률이 높다. (그것이 존재론을 가차없이 존재의 정보탱크로 전락시켰던 예는 이미 미국의 예에서 경험한 바 있다.)

 

네거티브의 미학: 비조각의 반전, 양보적 회의주의

 

여기까지라면, 이용덕의 세계는 다소 재능 있는 사실주의 조각의 범주에서 충분히 논의될 수도 있다. 전통의 성실한 승계, 일련의 서정적 리얼리즘에 비중을 두고 조망됐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용덕의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조각이 아니라, 극적으로 반전된 조각이며 그 반전을 가능하게 하는 시지각의 체계이다. 이 체계에 의해 인물들은 마치 기억 속에서 부활하거나 시간의 저편에서 망각의 벽을 뚫고 다가오는 기억과 역사의 파노라마가 된다.

 

이 너무나 현재적인 사건인 그들의 걸어옴으로 인해 전시장은 팽팽하게 긴장된 소통의 장으로 일변한다. 그들은 서로 다른 장소와 시간대, 즉 통시적 역사의 대사(大使)로서 사방에서 밀려오는 것 같다. 일순간 전시장은 그들의 에피소드와 드라마들로 넘실거린다. 이 충만한 다가옴에 의해 어떤 공간의 도약, 소통의 어떤 진화가 야기된다. 그로 인해 그것들은 감상용 오브제 이상의 것이 되고, 관객은 구경꾼 이상의 경험을 갖게 되는 그런 도약과 진화!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그들이 걸어오고 있다는 점이다”라고 말해야 한다. 헌데 정말 그런가? 그들은 걸어오는 것인가? 하지만 더 가까이 갔을 때, 우린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들은 실상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멀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벽을 등지고 나오는 대신 그 안으로 들어가고 있으며, 정확하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 같았던 그 전진으로 우리를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포지티브가 아니라 네거티브인 것이다.

 

그들은 더 가까이 다가오는 것처럼 보일수록, 더 멀어져 가고 있을 뿐이다. 걸어옴은 전적으로 눈 속임(trompe-l'oeil)에 의존하는 소통일 뿐이며, 따라서 그 걸어옴은 실재론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인식론적 차원에서만 참인 불완전한 명제다. 그들의 걸어옴은 불안정한 시각에 의해서만 작동되는 ‘불안정한 걸어옴’, 혹은 ‘시각 예속적’ 걸어옴이다.

 

이용덕의 일루젼은 만연하는 인식론의 위기와 동일한 문맥을 공유한다. 작가의 세계에서 진실은 전적으로 시지각 의존적인데, 그것은 “모든 진리는 체계의존적”이라는 타르스키(Tarsky)의 회의 주의적 인식론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작가의 지각 체계는 그것에 의해 대상의 이해가 결정적으로 달라지거나 왜곡되는, 칸트적 의미의 선개념이나 토마스 쿤의 과학적 패러다임과도 유비될 수 있다. 어떻든 그의 네거티브 역시 그로 인해 보고 또 믿게 하지만, 동시에 보는 것이 사실(진실)인지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하고, 대상은 시지각에 의존하게 되지만 바로 그 때문에 불안정한 대상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용덕의 네거티브에 의해 걸어옴/걸어감, 이쪽/저쪽, 다가옴/멀어짐, 그리고 조각/비조각의 구분이 일순간 상실되고, 실재론은 상대주의의 맷돌에 갈려버리게 되는 것 이다.

 

이용덕의 회의적 인식기제인 네거티브는 양괴, 볼륨 같은, 이제껏 ‘조각적 실재’로 인식되어 왔던 것들을 의심한다. 그것은 조각인가? 그러나 그것은 조각이 아니다. 오히려 조각의 제로상태보다 도 더 비조각적이다. 그것은 마이너스 조각 혹 조각의 마이너스고, 하여 거짓 조각이다. 그러나 이 양괴의 마이너스로 된 비조각, 혹 거짓 조각은 조각을 더욱 흥미로운 것으로 만든다. 포퍼 (Popper)의 교훈을 기억하자. “어떤 가설이 거짓일 수 있어야, 즉 거짓일 확률이 더 많아야 그 가설이 내용이 있다. (더 흥미롭다.)”

 

의식했던 하지 않았던, 이용덕은 다만 ‘조각은 포지티브’라는 규칙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라, 규칙, 질서로서 조각, 혹 조각의 패러다임 자체를 의심하는 것이다. 그는 가장 전통적인 방식으로 일하는 조각가지만, 종국엔 실재가 아니라 실재의 부정, 회의적 인식론이 그 내적 고백인 ‘비조각’에도 달하는 것이다. 이 조각을 회의하는 비조각이야말로 작가의 진정한 매력이다. 그것은 스스로 거짓진실, 혹 체계의존적 진실을 설정함으로써, 자신에게 부과되는 인식의 불가항력적 조건을 도출 하는 의미 있는 탐구가 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이용덕은 인식론의 논점을 다시 몽테뉴 이전으로까지 소급한다 할 수 있다. 이미 몽테뉴와 데카르트로부터 지식의 부적절한 수단으로 간주되어 왔던 지각의 문제를 문제삼음으로 써, 그리고 그것이 주축이 된 지각 의존적 게임을 설정함으로써, 자신이 데카르트적인 ‘이성과 논리의 확고한 표준’ 과 분명하게 대척점에 놓여있다는 점을 밝힌다. 작가는 지금 인식이 아니라, 인식의 위기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이용덕의 회의적 인식론은 지각의 문제를 건드릴 뿐, 진실을 문제 삼진 않는다. 이를테면, 그들이 걸어오는 것이건 아니건, 또는 실재적 조각이건 부재적인 비조각이건, 그들은 여전히 생의 예찬을 정당화 할 만큼 의미로운 텍스트들이다. 이용덕과 그의 세계가 기초를 두고 있는 ‘생에 대한 긍정’ 그 어떤 회의주의에도 양보할 수 없을 만큼 견고 하기 때문이다.

 

이용덕의 세계는 조각적 실재론과 인식론의 회의주의적 차원을 동시에 활용한다는 점에서 이중적이다. 그 지평 위에는 실재론과 인식론, 지각주의와 해체주의의 반영이 나란히 드리워져 있다. 그는 과장되지 않은 생을 읊는 시인이면서, 동시에 그 리듬과 음률의 반전을 탐닉하는 형식주의자며 그 한 쪽엔 노래 자체를 회의하는 인식론자의 모습도 있다. 여러 코드들이 뒤섞이면서 긴장감을 야기하는 이 같은 분위기는 참으로 매력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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