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덕과 조각의 이중부정
김 원 방 (미술평론, 작가)
해석하는 이용덕은 오랜 기간 실제와 그 재현의 문제, 실제가 어떻게 우리의 인식론적 경험으로 구성되는가 하는 문제를 천착해 온 작가이다. 이를 위해 그가 특히 즐겨 쓰는 방법은 음과 양이 도치된 속이 텅빈 네가티브 조각으로서, 이용덕은 이를 감탄스러울 정도로 완벽하고도 매력적으로 완성해내고 있다. 그것은 관객에게 거의 마술에 가까운 환영을 보여주는데, 나는 이러한 환영의 장치가 무엇보다도 좁게는 '조각'이 성립하는 토대에 대한, 넓게는 세계와 우리의 관계에 대한 매우 근원적인 반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고자 한다.
앞을 보며 경쾌하게 걸어오는 여자, 소파에서 낮잠을 자는 여자, 엎드려 한가로이 편지를 쓰는 여자. 귀여운 계집애들, 십대 청소년들의 농구시합 등... 조각의 소재로서 이 들만큼 편안하고 대중적이며 즐거움을 주는 소재는 흔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용덕의 조각들에 점차 가까이 다가 갈 때 관객들을 기다리는 것은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즐거운 조각적 질감과 세부가 아니라, 자신의 인식과 의식의 기반이 와해되는 경험이다. 소녀들의 입체적 이미지들은 마치 실체가 없는 가상현실처럼 관객의 역사적 시간감각을 농락하면서 홀연히 사라져 버린다. 조각 앞에 가까이 다가간 관객의 눈에 최종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일반적인 조각적 양괴가 아니라, 음과 양이 뒤바뀌어 제작된 네가티브 조각의 공허한 구덩이일 뿐이다. 여기서 관객이 받는 느낌은'박탈 당한다'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하다. "내가 만지려고 했던 그 소녀의 모습은 알고 보니 아무런 물질적 실체가 없는 '구덩이'에 불과했노라"라는 허망함 말이다. 헛것을 본 것이다. 갑자기 가장 믿었던 모든 것을 빼앗기는 것이다. 빼앗기는 것은 조각이라는 물질적 덩어리뿐만이 아니다. 그 형상들 ― '낮 잠자는 소녀', '책 읽는 소녀' 같은 ― 이 수반하던 주제적 즐거움과 상징적 의미들까지도 함께 증발해 버린다. 결국 그것은 조각이 아니라, '조각'과 '조각의 박탈', 이 양자가 하나의 연속체로 절합(articulation)된 것, 일종의 '조각-박탈', '조각-증발', '조각-부재' 와 같은 당혹스러운 이름으로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박탈, 증발, 부재는 단순히 '무'(無)가 아니라, 그 '현존의 부정' 또는 '현존의 흔적'이라는 상호교차배어법(chiasm)의 구조를 갖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관객이 이러한 '허깨비 조각'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것은 용이하지 않다. 아니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시지각적 특성은 적어도 그 네가티브 조각에 코가 닿을 정도로 다가가기 전까지는, 분명 물질적으로 실재하는 입체적 조각으로 지각되고 그렇게 믿게 만드는 마술을 부리기 때문이다. 관객이 이리 저리 몸을 부지런히 옮겨봐도 그것은 분명 '거기에 있다'. 결국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우리의 감각과 인식은 그 가짜 조각들이 연출하는 3차원의 허상에 인질이 되기 시작한다.
그것들은 마치 첨단 가상현실장치처럼, 나의 감각을 최대한 깊이 연루시킨다. 어떤 점에서 그런가 하면, 그 허상은 그 구덩이와 나의 공간적 거리, 방향적 위상, 그리고 환영을 이리저리 살펴보는 나의 신체적 운동, 이것들이 서로 밀접히 연관되고 나아가 일체가 됨으로써 비로소 실현되고 나타나는 허상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용덕의 조각에 대한 체험은 중량을 가진 실제 사물에 대한 지각의 경험이 아니라, '음각의 구덩이-전시장의 시공간-나의 신체', 이 3가지를 가로지르는 모호한 혼성적 지점에서 발생하는 환영이며, 이것이 바로 이용덕의 작품이 지니는 시공간적 위상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또한 그것은 관객의 시지각적, 신체적 특성이 밀접하게 참여하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생리학적 조각'이라고도 할 수 있다(로잘린드 크라우스는 이러한 특유한 생리학적 시공간을 '맥동'[Pulse]의 시공간이라고 부르면서, 기존의 시각중심주의적 관점 속에 가두어진 설명들을 비판한 바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러한 허깨비의 환영은 대상과 관객의 주체가 동시에 연루되는 상황이다. 그리고 이용덕의 조각은 더 이상 '물질적 대상'을 만들어 제시하거나 사실적인 '재현'을 만들어 내는 대신, 관객이 위치한 현존적 시공간을 총체적으로 개입시키고 연속시키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일종의 가상현실적 '몰입'(immersion)의 상황이며, 대상과 주체가 서로를 맞물리는 순간에 발생하는 상호교차적 시공간인 것이다.
이용덕의 작업이 지니는 두번째 독특한 면모는, 그러한 음각조각이 바로 과거에 실물이 있었던 '현재적 흔적' 또는 '현장'으로서 작용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실제의 조각을 만들어 내는 대신, '실제 조각의 주변공간을 캐스팅해 낸 작업'이라고도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실물이 접한 외부공간을 떠내는, 즉 '흔적'을 만들어 내는 작업은 현대미술의 경우, 뒤샹, 브루스 나우먼, 리차드 세라, 레이첼 화이트리드 등의 작가들이 많이 시도한 바 있지만, 이용덕의 방식은 그들과 또 다른 방법을 택하면서도 그러한 흔적의 제문제를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흔적이란 것은 실물을 이중적으로 타자화시켜 드러내준다. 우선은 그 흔적 자체가 본래의 실물에 대해서는 타자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그러하고, 그 다음으로 실물 자신이 현재 속에 타자의 자격으로 존속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용덕의 경우, 그 음각의 구덩이 자체는 그에 선행하여 '가상적으로 존재 했다'고 추정되는 포지티브한 '소녀상'의 외부공간을 물화(物化)시킨 것에 불과하다. 즉 그것은 소녀상이라는 실물의 외부에 있던 타자적 공간으로서, 이것이 현재 속에 지속하는 양상을 띄고 있다. 반면 양각으로 된 실제의 소녀 조각상은 과거 속으로 사라졌지만, '부재와 박탈의 흔적'이라는 형식으로 살아 남아서 현재 속의 이질적인 존재로 공존하는 양상을 띄게 된다. 바로 이렇게 이중의 관점에서 타자화되고 이중으로 부정된 형식으로서 대상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결국 이용덕의 음각 조각은 '이중의 부정', 즉 '존재 대 무'라는 이분법적 형식이 아니라, '존재의 부정 이면서 동시에 무의 부정'이라는 상호교차적 구조로 정의될 수 있다.
과거 속으로 지나간 것, 무의미한 것, 이미 죽은 것이 '지금 이곳 현재 속에 살아있다'는 것. 바로 여기에 흔적의 불길한 면모가 존재한다. 죽었지만 죽지 않은 채 현재를 사로 잡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죽은 자, 절대적 타자의 목소리를 지금 현재 듣고 있는 상황이 된다. 그것은 바로 현재 이 곳이라는 시공간의 토대를 근본적으로 교란시켜 버린다. 조르쥬 디디-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n)은 바로 그 점 때문에, 실물의 흔적은 곧 재현과 역사 속에 개입된 불편함이며, 일종의 병리적 의미에서 '시간적 증상'(time-symptom)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것은 예술에서의 영구적이고 안정된 재현의 문제를 '시간'과 '현존화'(presentification)의 문제로 바꾸어 놓는다. 그리고 현재라는 것은 과거의 모든 사건들, 기억들, 언어들이 사라지지 않은채 유령처럼 맴도는 끊임없는 타자화, 생성, 달라짐(differentiation)의 차원임을 감지하게 해준다. 현재라는 것은 완전히 이해불능한 것으로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경로를 통해 이용덕은 실재를 박탈과 좌절로서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엄격히 말하면 실재 만의 박탈 혹은 좌절이 아니라,'실재와 나 사이의 관계의 박탈 및 좌절'이라고 표현함이 정확하다. 일반적인 조각에서 성립하는 '실재와 나 사이에 시공간적 관계'라는 것은 곧 세계와 나 사이의 분리되고 객관화된 관계를 보장한다. 반면 이용덕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허깨비는 존재하지도 그렇다고 부재하지도 않은채, "현재 속에 현존하는 부재"로서, "현재 속의 타자"로서 모호한 시공간을 떠도는 양상을 취한다. 즉 그 허상과 나와의 사이에 객관적 거리는 없어진 채, 앞서 언급한 것처럼 총체적으로 서로 연결된 맥동의 생리학적 공간 속에서 나의 내부로 침입해 들어오는 양상을 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라깡 식으로 표현하자면, '나'라는 주체의 견고함과 독립성을 보장해주는 언어적 사유(즉 상징계)를 교란시키고, 그 대신 지속적인 표류, 강박적인 재확인("내가 지금의 내가 맞는가?"라는 자의식)으로 관객의 의식을 몰고 간다. 그것은 바로 이용덕을 포함해서, 초현실주의 미술과 그리고 마술이 서로 공유하는 특징이요, 충격이다.
결국 관객에게 남는 것은 무한히 표류하는 현재에 대한 순수한 감각, '내가 허상을 보고 있음을 다시 바라보는 나'에 대한 과잉 된 감각, 허상이 세계의 것인지 나의 것인지 결정할 수 없는 그 모호함에 대한 '지나친' 감각일 뿐이다. 이용덕 자신도 이 지점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하고, 정당하고, 필연적인 말 한마디를 던진다. "감각에 집중하라."
필자 소개:
김원방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학사, 파리 1대학원에서 예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예술기획과 교수를 역임하였고, 부산비엔날레 예술감독(2008)을 지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운영자문위원인 그는 현대미술의 담론과 미적가치를 이론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