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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상조각을 대할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

 

김남시, 이화여대 예술학부 교수 

  

 

예술과 감각적 즐거움               

 

오늘날 예술에서 ‘감각적 즐거움’을 좀처럼 이야기하지 않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진리는 감각적인 영역 너머에 존재한다는, 플라톤을 필두로 한 주지주의적 태도는 예술이 주는 감각적 즐거움을 폄하함으로써 생겨났고, 60년대 이후 비판이론은 감각적 즐거움을 자본주의적 상품 미학의 이데올로기와 결부시켰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60년대 이후 미술은 탈감각적이자 개념적인 미술을 주로 추구하였고, 작품의 가치는 그것이 얼마나 개념적으로 복잡하고 지적 매개변수로 분석될 수 있는지에 따라 평가되었다. 미술에서 이러한 주지주의적 경향은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대중들에 대한 멸시와 그와 결합된 엘리트주의와도 무관하지 않다. 대중을 즐겁게 하는 예술은 그 대중을 우둔하고 온순하게 만들어 지배하려는 “소비산업의 이데올로기”라고 평가하는 아도르노의 관점이 대표적이다. 이는 소위 ‘저급예술’과 ‘고급예술’을 구별하고 저급예술에 탐닉하는 대중과 그들을 이끌어야 하는 엘리트라는 이분화에 근거한다. 예술작품에 대한 진솔한 경험보다 예술작품을 통한 계몽적, 교육적 효과를 우선시하는 이러한 지적 편향은 예술 교육기관의 교육방식과 갤러리 및 박물관의 큐레이션 전략들에서도 관철되어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동시대 미술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나 자신도 미술에 대한 이러한 주지주의적 편향에서 자유롭지 않았음을 먼저 고백해야겠다. 이용덕 작가의 작품을 사진 이미지로 처음 접했을 때 나는 이 작가가 인체 조각이라는, 동시대 미술 현장에서는 고루하게 여겨지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난처했었다. 그의 작업은 현대미술이 거의 폐기하다시피 했던 재현에 기반하고, 모더니즘 미술이 비미술적이라 배격한 주제를 담으려 했기 때문이다. 이 작가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을까? 나중에서야 나는 이 작가가 그를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당대 미술의 흐름에 좌고우면하지 않으면서 고집스럽게 자신의 작업을 밀고 나가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작가적 태도는 이미 젊은 시절, 예술이 무엇인가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문제의식하에 <현실과 발언> 참여를 거절하고 졸업 후 첫 개인전 때부터"나는 신작로가 아니라 오솔길을 걷겠다"고 선언했던 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동시대 흐름에 민감한 젊은 작가들을 교육해야하는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도 이용덕 작가가 고집스럽게 자신의 작업 방향을 고수할 수 있었던 건 미술이란 무엇보다 아름다움을 향해야 한다는 작가의 깊은 신념 때문이었다. 이용덕 작가는 조소 전공 학부 시절부터 인체 소조/조각에 탁월한 재능을 보여주었으며 인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대상이라고 여겼다. 인체 조각의 고전적 이상이던 그리스 조각이 옷 주름과 머리카락 등으로 움직이는 신체의 역동적 순간을 탁월하게 포착해 내었던 것처럼, 이용덕 작가도 스쳐 지나가면서 순간적으로 목격되는 사람들의 모습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다”[1]고 느끼고 그 순간을 사진으로 촬영하거나 잡지 등에서 찾아 부조를 만들고 그를 캐스팅해 역상 조각을 만든다. 이처럼 이용덕 작가 작업의 출발점에는 아름다움에 대한 끌림이 있다. 이것이 보는 사람에게 ‘시각적 즐거움’을 불러내는 작업의 원동력이다. 

 

             이용덕 작가의 작품은 미술은 시각적 매력을 주는 것이라는 작가 본인의 신념과 분리해서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신념은 뛰어난 작가적 기량에 의해 뒷받침된다. 모든 미술 작가의 작업이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역상조각은 고도의 조각적 역량을 필요로 한다. 역상조각을 만들기 위한 첫번째 공정은 작가 스스로 찍거나 잡지 등에서 찾은 사진을 부조로 전환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어떤 수학적 계산으로도 불가능한, 공간적, 조각적 감각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조형능력을 필요로 한다. 사진의 평면 이미지 속에서 일부는 가려지고 축약된 대상을 다시 3차원 공간화해야 할 뿐 아니라 이렇게 제작한 양각 부조로부터 캐스팅을 통해 뽑아낼 음각의 깊이를 염두에 두면서 그 양각 부조의 높이를 미리 가늠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조각적 감각은 구슬들이 꿰어져 있는 12겹 레이어의 구조물을 이용 깊이감 있는 전체 형상을 만들어내고 <oscillating bride 094181, 2009>, 자르지 않은 합판 500장을 쌓는 것만으로 역동적인 인체 형상을 만들어내는 일 <encounter-submission, 2014>도 가능하게 하였다. 이를 보면, 누군가의 옆모습만 보고도 그의 신장을 정확히 가늠하고, 어떤 장소를 한 눈에 보고서 여러 사물들의 배치를 공간적으로 포착할 수 있다는 작가의 놀라운 말도 거짓이 아닐 것이다.    

 

 

역상 조각의 미학적 특징 

 

이 글에서 나는 역상조각이 불러내는 시각적 효과를 인지과학적 관점에서 설명해보고자 한다. 그 전에 역상조각 작품의 중요한 미학적 특징 몇 가지를 지적해두기로 하자. 

 

첫째, 역상조각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조각으로서의 무거운 존재 방식과 그것이 불러내는 가벼운 시각적 효과의 대비다. 역상조각 작품들은 덩어리의 육중함을 감각하게 하는 대신 살아있는 듯 부유하며 움직이는 인상을 불러낸다. 전통적인 회화가 ”빛과 그림자라는 조각적 수단을 완전하게 이용해서 평평한 표면에 입체의 환영을 얻어내려“[2]해왔고, 조각이 3차원 사물을 비추는 실제의 빛과 그림자를 보여주었다면, 역상 조각을 감상할 때 우리에게 떠오르는 이미지는 음영과 원근법을 이용해 회화가 만들어왔던 조각적 환영도 아니고, 일반적인 조각 작품이 주는 실제 사물의 감각적 인상도 아니다. 역상조각 작품 앞에 선 우리에게 떠올라 우리 몸의 움직임을 따라 움직이는 저 이미지의 존재 양상은 지금까지 미술이 다루어왔던 “빛과 그림자 사이의 유희”[3]를 넘어선다. (아래에서 확인하겠지만 그건 우리의 두뇌와 눈이 함께 만들어내는 것이다.)

 

둘째, 이로 인해 역상조각의 시각적 효과는 사진 같은 복제 이미지로 재현되지 않는다. 역상 조각의 환영적 효과는 양안을 가진 관객이 작품 앞에서 적절한 거리를 취하고 시선을 움직이고 좌우로 몸을 움직여야만 나타난다. 그건 단안 렌즈를 갖추고 움직임이 없는 카메라로는 포착되지 않는다. 오늘날 거의 모든 미술작품을 복제해 유통시키는 카메라는 역상조각 앞에서는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사진은 역상 조각의 정보를 전달할 뿐 작품의 시각적 효과를 전달할 수 없다. 역상 조각은 그 앞에 보면서 움직이는 관객의 몸이 현전할 때에만 그 비밀스러우면서도 유쾌한 모습을 드러내 보인다. 

 

셋째, 그 이유는 작품의 시각적 효과가 감상자의 움직임에 따라 역동적으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역상조각은 그를 보는 사람의 거리와 위치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어떨 땐 분명한 양각처럼 보이다가 다른 때는 양각인지 음각인지 모호한 경계 사이에서 요동하고, 또 어떤 때는 아예 우리 눈앞에서 사라져버리기도 한다. 케이트 림은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음각 형상과 어떤 적절 거리를 유지하면, 그 음각은 윤곽과 부피로 부활한다. 작품과 관객 간의 이 물리 거리는 이상한 속성이 하나 있다. 이 ‘거리’를 반항적으로 깨고 다가가서 무엇인지를 느끼고 싶게 만드는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관객은 알고 싶기 때문에 ‘거리감’을 깨뜨리게 된다. 그러고 나서 우리의 눈앞에 벌어지는 것은 거의 아무런 질서나 규칙이 없는 미적 성찬과 같다. 결국 이 거리는 단순한 거리가 아니나 심미적 거리’이다. 이 거리를 깨뜨리면 좀 전에 보았다고 믿었던 대상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오로지 음각 껍데기에 남아있는 불편한 부정만이 있게 된다.”[4]

             

넷째, 이 점에서 역상조각의 출발점이 실루엣이었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이용덕 작가에게 있어 2000년도 [존재의 양면]전시에서 보여준 평면 위에 투사되는 실루엣 이미지는 2003년 초부터 체계화된 역상 조각으로의 디딤돌이 되었다. <confrontation-encounter, 2000>에서는 남성 실루엣이 반대편에선 여성의 그것으로, 여성 실루엣이 남성의 것으로 변환 transformation 되는 실험도 행해졌다. <aphasie-reflex, 2000>에서는 실루엣 조각에 빛을 투사해 벽면에 실루엣 그림자를 생성하였고, <absence, 2000>에서는 투사된 관객의 그림자/실루엣이 벽면에 이미지로 남는다. 

 

             흥미롭게도 이런 방식으로 인체 이미지를 생성하는 이야기는 미술의 기원에 관련된 오랜 이야기에도 등장한다. 고대 로마의 역사학자 대 플리니우스는 [자연사 Historia Naturae] 35권에는 ‘미술의 기원’에 대한 일화가 등장한다. 그리스 코린트의 도공 부타데스Butades에게는 데부타데 Debutade 라 불리는 딸이 있었다. 그녀는 같은 마을의 한 청년을 사랑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가 전쟁에 군인으로 징집되게 되었다. 데부타데는 애인이 전쟁터로 떠나기 전날 밤 그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 벽에 비친 애인의 그림자, 곧 실루엣을 따라 그렸고 이것이 회화의 기원이라는 이야기다. 데부타데가 모사한 애인의 실루엣은, 그에게 일어날 어떤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체의 핵심적인 프로필을 벽에 남겨둘 것이었다. 실지로 실루엣은 유럽에서 19세기 초 사진이 등장하기 전까지 사람들의 초상화를 대신하는 이미지로 활용되었다.[5] 한 인물의 세부적 디테일을 사상하고 핵심적 특징만을 드러내는 실루엣은 그를 통해 그 인물을 특정할 수 있는 이미지였던 것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건 "실루엣"이 실물과 그림자, 실물의 포지티브 상태나 네거티브 상태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자, 이 두 서로 다른 양상의 존재들이 함께 접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실루엣으로부터 시작된 이용덕 작가의 역상조각은 그 출발에서부터 포지티브와 네거티브 양자를 관통하는, 그 둘의 대립 속에서도 존재하는 것을 담지 한다. '실루엣'을 각각 void와 mass의 형태로 만든 작업<confrontation-encounter, 2000>은 양각과 음각 두 형태에서도 여전히 계속 존재하는 것이 실루엣이라는 아이디어를 전제한다. 덩어리로부터 주변을 제거해 (양각으로) 만들어졌건, 덩어리를 파내어 (음각으로) 만들어졌건 여기서 '실루엣'은 본질과 실체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 중심에 존재한다.[6]

역상 조각의 시각적 착시      

 

역상 조각을 직접 관람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일반적인 양각 positive 조각은 주지 못하는 작품의 시각적 효과에 놀라운 즐거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작품 속 인물이나 사건이 특별한 것도 아니고 어떤 거창한 스펙타클을 만들어내는 것도 아니다. 포대기에 아이를 업고 있는 여인 <mohter 091185, 2024>, 바닥에 놓인 대야에서 얼굴을 씻는 노인 <wash up 042483, 2012>, 입을 가리고 수줍게<giggling 110681, 2011>, 아니면 호탕하게 웃는 사람들 <laugh 055582, 2005>, 앉거나 <sitting140786, 2014>, 선 채로 <standing 070184, 2007>, 생각에 잠기고, 어딘가를 바라보는 소녀들 <looking 040783, 2004>,  < watching 240581, 2024>처럼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이 재현된 이 작품들 앞에서 관객들은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며 한껏 즐거워한다. 조각 속 인물의 얼굴이 양각이었다가 돌연 음각으로 바뀌고 우리 몸을 움직임에 따라 조각의 얼굴이 우리 시선을 따라오기 때문이다. 어떤 종류의 시각적 착시가 일어나고 있는 건 분명한 듯한데, 놀랍게도 그것이 착시임을 아무리 의식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이 착시 효과는 오리-토끼 착시(보는 방식에 따라 오리로도 토끼로도 보이는 착시 그림)에서 처럼 우리의 의식적인 해석 전환에 따라서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우리의 의식적 제어를 넘어서는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인지-지각적 작동이 있다고 추정할 수밖에 없겠다.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우선 확인해 두어야 할 사실이 있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가 전부 의식하지도, 또 알지도 못하는 수많은 행위자들을 통해 작동한다는 것이다. 운전자가 자동차의 엔진과 구동장치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모르면서도 자동차를 운전하듯 우리의 마음 역시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우리의 몸을 운용한다. 일례로 지하철역까지 가겠다는 일반적인 의도만을 자각하면 나머지 모든 일들은 저절로 처리된다. 적절한 순간에 두 다리를 움직이고, 걸어가는 도중 여러 장애물을 피하고, 그러면서도 가야 할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실지로 걸어가다 방향을 돌린다는 건 실제로 아주 복잡한 일이다. 한쪽으로 더 크거나 작은 보폭으로 방향을 바꾸면 균형을 잃고 바깥쪽으로 넘어질 수 있기에 처음에 도는 방향의 안쪽으로 쓰러지도록 자세를 잡아 방향을 돌고, 곧바로 원심력을 이용해 다음 발걸음에서 자세를 바로잡아야 한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이러한 절차는 온갖 근육과 뼈, 관절들로 구성된 수많은 행위자들이 수백 개의 상호작용에 의해 조정된다. 그 결과 ”당신이 생각하는 것은 오로지 ‘저 길목에서 돌자’라는 것이고, [그러면] 그 바람은 자동으로 완수된다.“[7] 이처럼 우리의 많은 행동은 우리가 전혀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수많은 절차들을 제어하는 마음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를 위해 우리 몸과 마음의 행위자들은 수많은 전기적, 생화학적 신호들을 사용하는데 어떤 행동을 할 때 어떤 신호가 어떻게 우리의 두뇌와 몸을 가로지르는지 우리는 거의 확인하지 못한다. 이 점에서 인공지능 과학자 마빈 민스키는 <『마음의 사회』 The Society of Mind>에서 인간의 마음을 수많은 행위자들로 구성된 하나의 사회로 볼 것을 제안한다. 

 

             

인간 두뇌의 작동방식  

 

<『마음의 사회』>는 우리의 지각, 생각, 기억, 학습, 감정, 추론, 언어사용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우리 마음의 어떤 행위자들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통해 일어나는지를 설명한다. 인간의 인지과정 전반을 포괄하는 이 책의 방대한 내용 중 역상조각의 시각적 효과를 이해하는데 유용한 개념들이 있다. 프레임(Frame), 선행추정(default assumption), 프레임-배열(Frame-Array)이다. 

 

             프레임은 두뇌가 우리가 접근하는 대상이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활용하는 구조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강의실에 들어설 때 두뇌는 강의실-프레임을 활성화시킨다. 여기에는 강의실에 있으리라 상정되는 물건과 사람들, 거기서 벌어지는 전형적인 상황들, 크기 등과 같은 정보가 포함된다. 이 프레임은 우리의 앞선 경험들로부터 얻어진 것으로 우리 두뇌에는 이런 수백만 개의 프레임들이 잠재되어 있다. 프레임은 일종의 골격으로 거기에는 채워야할 많은 빈칸들이 있다. 민스키는 이 빈칸들을 단자 terminal 라고 부른다. ‘강의실’ 프레임은 다양한 강의실의 모양과 크기, 그곳에 있을법한 물건과 상황 등의 단자들로 채워져 있을 것이다. 다양한 ‘강의실’에 대한 경험이 쌓일수록 그 프레임을 채우는 단자들은 더 풍부해질 것이다.

 

             우리 두뇌에 잠재하는 이 프레임들은 특정한 지각에 의해 활성화되는데, 그러면 우리는 구체적인 대상과 상황을 일일이 경험해보지 않고서도 그에 관한 많은 것들을 미리 알게 된다. 예를 들어 누군가의 생일파티에 초대받는다면 ‘생일선물’, ‘생일케익’, ‘축하인사’ 등의 단자들로 채워진 ‘생일파티’의 프레임이 활성화될 것이다. 예상할 수 있듯 이 프레임들은 통상 전형적인 것들로 채워진다.누군가가 ‘개’에 대해 말하는 걸 들으면 우리 두뇌에 잠재적이던 ‘개’의 프레임이 활성화되어, 그 즉시 두뇌는 그 개가 네 개의 다리와 꼬리 하나를 갖고, 짖거나 사람을 물을 수도 있을 것이라 추정한다. 이것이 선행추정 default assumption이다. 하나하나 모든 걸 직접 검토해보기도 전에 두뇌는 (프레임과 그를 채운 단자들에 입각해) 전형적인 것들을 자동적으로 가정하는 것이다. 

 

             선행추정은 특정 행동을 하기 전에 우리를 준비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예를 들어 두뇌는 우리가 걷는 땅이 단단할 것이라고 선행적으로 추정하며 그에 입각해 우리 몸의 운동기관을 작동시킨다. 매번 발을 디딜 때마다 바닥이 단단할지, 꺼지지 않을지를 의식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면 우리는 걸을 수 없을 것이다. 건물의 파사드만 보고도 두뇌는 저것이 3차원 직육면체라고 추정하고, 탁자를 두고 마주앉은 앞사람의 다리가 보이지 않아도 두뇌는 그가 의자에 앉아있을 것이라 추정한다. 선행추정은 독서를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글을 읽을 때 우리는 몇 개의 낱말을 통해 거대한 선행추정의 네트워크를 활성화시킨다. ‘존이 공을 던졌다’라는 글을 읽고 우리는 색깔, 크기, 무게 등 그 공이 지닌 모양과 성질을 무의식적으로 추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꾸며내는 작가는 독자의 마음에 이미 깔려있는 거대한 추정의 네트워크를 활성화하는 문장을 구사한다.”[8]

 

             이렇게 보자면 무엇인가를 지각하는 건 지금 당장 그 대상으로부터 온 감각자극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외부세계에서 우리 눈에 도달하는 것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러한 자극들을 해석하는 방식은 우리의 행위기구들 내부에서 이미 일어난 일에 크게 의존한다.”[9] 내게 앞모습만 보이는 상대방이 여기 온전하게 ‘현전 present’ 한다고 느낄 수 있는 건, 그가 내 눈에 보이는 그 한쪽 면으로만 이루어진 반쪽짜리 존재가 아니라고 가정하는 선행추정 덕분이다. “예컨대 전화기를 볼 때 우리는 그 색깔, 짜임새, 크기, 모양 등 볼 수 있는 측면들에 대한 감각을 가지게 되고, 그것을 도구로서 귀에 갖다 댈 때 어떻게 느껴질지에 대한 감각도 아울러 가지게 된다....그런가 하면 그것을 만지지 않고서도 그것이 어느 정도로 무거운지, 그것이 부드러운지 딱딱한지, 그리고 그것의 보이지 않는 측면이 어떻게 생겼을지 등에 대한 감각을 지닌다. 이러한 파악들은 기억에서 생겨난다. 이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이 지금 여기에 ‘현전 present’ 한다고 느낀다.”[10] 우리가 지각하는 대상이 지금 여기 현전한다고 느끼는 이유는, 1) 감각기관에 전달된 부분적 자극이 우리 두뇌에 잠재하던 프레임을 활성화하고, 2) 그 특정 프레임을 전형적인 내용으로 채우고 있는 선행추정이 그 자극을 자동적으로 보충하기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무엇으로 인식하기 위해 입력되는 것들은 감각에서 오는 것보다 기억에서 오는 것이 훨씬 더 많다. 우리는 지금 우리 눈  앞의 것을 이전의 경험과 기억에 입각해 지각하고 인식하는 것이다. 

 

             지각과 인지의 이러한 성격은 종종 우리를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 고속도로에서 빠른 속도로 주행하다 속도를 줄이면 실제 속도보다 더 천천히 간다고 느끼거나, 날아가는 비행기처럼 멀리 있는 물체를 실제보다 더 작다고 생각하거나, 손을 흔들거나 미소를 짓는 누군가를 우리가 아는 사람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일들은 우리 두뇌가 만들어내는 착각들이다. 누군가 장난감 뱀으로 우릴 화들짝 놀라게 할 수 있는 것도 우리 의지와 무관하게 활성화된 두뇌의 프레임과 선행추정 때문이다. 나아가 이는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것을 알아차리기 힘들게 한다. 지각과 인식이 과거의 경험에서 온 프레임에 입각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인간의 지각과 인지는 왜 이렇게 보수적인 방식으로 작동하도록 진화한 것일까?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기억에 기반해 작동하는 프레임과 선행추정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보다 빠르고 신속하게 반응하게 해준다. 매번 그때마다의 감각 데이터를 새롭게 해석하고, 모든 것을 하나하나 확인해야 한다면 생존하기 힘들 것이다. 프레임과 선행추정 덕분에 우리는 적은 수의 감각 정보만으로도 신속하게 우리의 행동을 제어할 수 있다. 환경의 복잡성을 최대한 감축해 신속하게 대처함으로써 생존능력을 높여야 하는 생물인 인간에게는 이것이 유리할 수밖에 없다. 두뇌는 감각기관이 제공하는 정보를 최대한 보수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도록 진화되었다. 

 

 

양각이 음각으로 전환하는 순간   

 

             두뇌의 이러한 특성은 역상조각을 접할 때 여실히 드러난다. 거리를 두고 역상조각을 접하면 조각 속 인물의 얼굴은 양각으로 보인다. 왜 그럴까? 인간의 두뇌는 환경에서 마주치는 거의 모든 물체를 양각으로 인식해왔다. 그 중에서도 인간의 얼굴은 수백만 년 진화 과정을 거치면서 두뇌가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 대상이다. 인간의 두뇌에는 특히 얼굴 패턴을 빠르게 인식하는 측두엽(temporal lobe)과 전두엽(frontal lobe)이 발달되었는데, 그로인해 우리는 구름, 바위, 나무껍질, 음식 등 거의 모든 사물들에서도 얼굴을 읽어낼 수 있다. 얼굴을 인식할 때 우리 두뇌는 볼록한 형태를 기본으로 가정한다. 진화적으로 획득된 두뇌의 선행추정이다. 얼굴은 볼록하다는 두뇌의 선행추정이 얼마나 강하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유명한 사례가 ‘할로우 마스크 착시 Hollow Mask Illusion’[11]다. 아무리 열심히 들여다보아도 우리는 가면의 오목한 뒷면을 볼록한 앞면이라고 착각하고 만다. 그러니 역상 조각의 인물들을 양각으로 착각하는 건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수백만 년을 거쳐 진화한 인간의 두뇌를 우리가 물려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로부터 출발하여 작품 앞으로 조금씩 다가가다 보면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볼록해 보이던 조각 속 얼굴이 어느 순간 돌연 오목한 음각으로 바뀌는 것이다. 저 얼굴이 볼록한 양각이라던 두뇌의 선행추정이 실제의 깊이를 포착하게 된 눈의 시각 정보에 의해 교정되는 것이다. 두뇌가 ‘보던’ 걸 비로소 눈이 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가벼운 현기증이나 어지러움을 동반하는 이 스위칭의 순간을 우리는 ”방금까지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대상이 어느새 쏙 빠져나가 버린 듯한“[12] 느낌으로 경험한다. 

 

 

따라오는 얼굴 

 

두 번째 착시도 놀랍기는 마찬가지다. 작품을 보며 몸을 좌우로 움직임에 따라 조각 속 인물의 얼굴이 우리 시선을 따라 오는 것이다. 이는 어떻게 생겨나는 것일까? 이를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개념이 프레임-배열 frame array이다. 가령 내가 처음 들어선 곳이 공장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조각가의 작업실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고 해보자. 처음에 활성화된 ‘공장’의 프레임이 ‘조각가 작업실’의 프레임으로 바뀐 것이다. 이런 프레임 전환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 애초에 내가 조각가 작업실을 공장으로 착각했던 데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다. ‘공장 프레임’을 채우고 있던 단자들과 ‘조각가 작업실 프레임’을 채우고 있던 단자들이 상당 부분 서로 동일했기 때문이다. “조각가 작업실 프레임”과 “공장 프레임”이 예를 들어 ‘높은 천정’, ‘크레인’, ‘선반 기계’, ‘바닥의 먼지’ 등의 단자들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를 통해 내 두뇌 속에서 두 프레임이 서로 연결된 것이다. 

 

             공유하는 단자들을 통한 프레임의 연결은 한 대상을 움직이면서 바라볼 때도 일어난다. 하나의 사물, 예를 들어 정육면체를 이동하면서 보면 서로 다른 각도와 시점에 따라 그 형태와 크기가 달라진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서로 다른 감각정보들을 각각 서로 다른 사물로 귀속시키는 대신 한 정육면체의 여러 면들이라고 인지한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프레임 배열 Frame-array’ 덕분이다. 민스키에 의하면, 한 대상을 움직이면서 바라볼 때 우리 두뇌는 그때마다 서로 다른 상태에 처한다. 정육면체를 왼쪽에서 볼 때, 정면에서 볼 때, 오른쪽에서 볼 때마다 두뇌에는 서로 다른 프레임이 활성화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하나의 사물의 면들이라고 인지되는 건 그 프레임들이 동일한 단자들을 공유하고 있고, 그로 인해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프레임 배열을 구축하기 때문이다. “동일한 단자들을 공유하는 이런 프레임들의 그룹에 나는 프레임 배열이라는 명칭을 붙이고자 한다.“[13] 우리는 여러 시점에서 본 정육면체의 서로 다른 모습들 전부를 결코 한 번에 볼 수 없다. 그럼에도 그 정육면체의 디테일들을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여러 시점에서 둘러볼 때 활성화된 프레임들 모두를 프레임 배열을 통해 ’마음에 가지고‘있기 때문이다. 곧 우리 마음 속에서 그 프레임들이 배열 array 되어 한 그룹으로 묶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가 움직일 때마다 다르게 보이는 것들이 하나의 정지된 stationary 대상으로 보인다는 건 우리 마음의 놀랄만한 역량 덕분이다. 그를 위해서는 우리 마음에는 여러 층위의 행위자/관찰자가 존재해야 한다. 우리가 움직일 때마다 변화하는 감각자극들을 수용하는 시각체계(1차관찰자)와 그 시각체계의 작동을 관찰하는 2차관찰자(중간수준의 행위자) 나아가 이 2차관찰자의 작동을 관찰하는 3차관찰자(상위수준의 행위자)가 그것이다. ”우리의 상위수준 행위자들은 우리 눈에 있는 센서의 출력물들을 전혀 ‘보지’ 않는다. 대신 상위수준의 행위자들은 그렇게 자주 상태를 바꾸지 않는 중간수준의 행위자의 상태를 ‘관찰’한다.“[14] 3차 관찰자, 즉 상위수준 행위자는 중간수준 행위자가 사용하는 서로 다른 프레임들을 일련의 배열로 묶어 그들이 동일한 한 대상에 속하는 것이라고 판단한다. 이렇게 프레임들을 배열할 때 이 상위수준의 행위자는 눈에 들어온 감각정보들을 우리의 눈, 목, 몸, 다리 등의 움직임을 고려하여 재계산하고 수정한다. 우리가 움직이고 있는데도 사물들이 연속적이라는 감각을 갖는 건 그때마다 두뇌에서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이 작동 덕분이다. ”우리가 세계와 항상 접촉한다는 감각은 진짜 경험이 아니다. 그건 내재적 환상 immanence illusion 의 형식이다. 실재에 우리의 감각은 우리의 시각체계가 제기한 모든 질문들이 너무나 신속하게 답변되는 나머지 그 답변들이 마치 이미 거기 있었던 것처럼 여겨질 때 갖게되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이 프레임 배열이다.“[15]

 

             중요한 건 이 ’프레임 배열‘이 ”우리가 세계에 대해 배운 것을, 우리가 머리를 돌리고 몸을 움직일 때 변하지 않고 남아있는 단자들에 저장하는 기능“[16]을 갖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정육면체는 그를 왼쪽에서 볼 때와 오른쪽에서 볼 때 서로 달리 보인다는 사실’ 자체를 정육면체 프레임의 단자들에 저장한다는 것이다. 우리 두뇌는 특정한 방식으로 우리 눈에 보이는 사물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사물이 서로 다른 위치와 시점에서 다르게 보인다는 것, 나아가 어떻게 다르게 보인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다. 우리 두뇌 속 프레임에는 그 사물들이 어떤 상황과 위치, 시점에서는 어떻게 보일지도 함께 저장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가 아는 사물들에 대해 일정한 기대 expectations[17]를 가질 수 있다. 비가 오면 보도블럭의 색깔이 변하고, 바람이 불면 나뭇가지가 흔들리며, 바닥에 떨어뜨리면 유리잔이 깨진다는 ‘기대’가 그 사물들의 프레임에 함께 저장되어 있지 않다면 그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우리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 것이다. 둥근 접시의 프레임에는 그를 옆에서 보면 타원으로 보인다는 사실이 함께 저장되어 있고 그에 따라 우리는 접시를 옆에서 보면 타원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갖는다. 그 기대가 실지로 충족되기에 둥근 접시는 우리에게 ”계속해서 둥글게 ‘보이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기대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접시의 모양은 자기 스스로 변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the shape will seem to change of its own accord“[18]  

 

             이 구절은 역상조각이 우리 시선이 이동함에 따라 ‘자기 스스로 변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을 설명해주는 핵심이다. 이용덕의<laugh 0555, 2005>은 호방하게 웃고 있는 세 사람의 얼굴을 재현한 작품이다. 앞에서 설명한 이유로 이 얼굴들은 기본적으로 볼록한 양각으로 보인다. 두뇌의 선행추정 때문이다. 이와 함께 활성화된 인간의 얼굴 프레임에는 그를 옆에서 보면 앞면과는 다르게 보일 것이라는 사실이 함께 저장되어 있고 그에 따라 두뇌는 그를 기대한다. 내가 오른쪽으로 이동하면 이 얼굴의 왼쪽 측면이, 왼쪽으로 이동하면 그 오른쪽 측면이 보일 것이라는 기대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서 이 기대는 충족되기에 우리는 아무 문제없이 사람의 얼굴을 마주한다. 그런데 역상조각 앞에서는 다른 일이 일어난다. 우리 두뇌가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는 기대와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난다. 양각이 아닌 음각으로 파여져 있기에 우리가 좌우로 이동할 때마다 우리 눈에는 두뇌의 기대와는 반대 방향의 시각 정보가 제공되고, 그 결과 조각의 얼굴이 자기 스스로 우리의 시선을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이용덕의 역상조각이 주는 시각적 효과는 우리 자신이 의식하지도, 제어하지도 못하는 두뇌와 감각 체계의 작동으로부터 생겨난다. 근본적으로 우리 두뇌와 마음에 잠재된 프레임들과 감각정보를 받아들이는 시각체계 사이의 긴장과 충돌이 역상조각의 시각적 착시의 원인이다. 좀 더 일반화시켜 말하자면 이는 과거의 경험에 입각해 ‘두뇌가 아는 것’과 ‘눈이 보는 것’ 사이의 긴장과 충돌에서 나온다. 아는 것과 보는 것은 밀접하게 서로 연동되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시각 경험을 규정한다. 아는 것이 없다면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없지만, 아는 것이 보는 것을 일방적으로 규정하면 우리의 시각은 새로운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19] 이용덕 역상조각은 시각적 놀라움을 통해 이 관계에 대해 사유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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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김남시는 서울대학교에서 미학(학사, 석사)을 전공하고 베를린 훔볼트대학 문화학과에서 PhD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대 조형예술대학 예술학 전공에서 미학 및 문화이론 담당 교수로 재직 중이다. 미술이론과 비평, 매체이론을 연구하며 발터 벤야민, 프리드리히 키틀러, 아비 바르부르크, 보리스 그로이스, 마르쿠스 가브리엘 등의 저작을 번역하였다.

 

[1] B. Critic 인터뷰, 2006. 

[2] 클레먼트 그린버그, <예술과 문화>, 199.

[3] Kate Lim, Narrative of the inverted Existence.

[4] Kate Lim, Narrative of the inverted Existence.

[5] https://www.silhouettesbyhand.com/history (2024.08.08. access)

[6] 이에 대해선 LEE, Yong Deok, Reflections on the Silhouette 참조.  

[7] 마빈 민스키, 『마음의 사회』, 89. 

[8] 마빈 민스키, 『마음의 사회』, 471.

[9] 마빈 민스키, 『마음의 사회』, 395.

[10] 마빈 민스키, 『마음의 사회』, 286.

[11] https://www.youtube.com/watch?v=pH9dAbPOR6M

[12] “볼록하게 보이는데 오목한 음각...비움통해 채우다.” 세계일보, 김신성 기자. 2024.06.24.

[13] 마빈 민스키, 『마음의 사회』, 487.(번역 일부수정)

[14] 마빈 민스키, 『마음의 사회』, 488. (번역 일부수정).

[15] 마빈 민스키, 『마음의 사회』, 491. (번역 일부수정) 

[16] 마빈 민스키, 『마음의 사회』, 488. (번역 일부수정)

[17] 마빈 민스키, 『마음의 사회』, 492.

[18] 마빈 민스키, 『마음의 사회』, 488. (번역일부 수정) 

[19] 김남시, <본다는 것>, 너머학교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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