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조각의 계승과 동시에 전복인 역상 조각
심상용(서울대학교미술관 관장)
1. 역상조각의 역성성(易姓性)
소조, 흙과 노동, 구상 조각, 눈속임 효과(trompe-œil)..., 근대 이후 20세기 미술의 조류에서 의미가 과소평가되어 온 것들이다. 이 시의적 과소평가를 다시 읽어, 역사적으로 재맥락화해야 한다는 것이 이 글의 주장이고, 그 한 가운데에 이용덕의 역상조각이 있다.
어느 시대나 어느 한쪽으로 쏠리고 치우친다. 그동안 오랜 기억과 새로움의 경작을 둘러싼, 모험심과 탐구열로 충만한 운동은 정지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잠시 현상계의 뒷켠으로 잠시 물러나 있을 뿐, 운동 자체가 멈춘 것은 아니다. 그러다 때가 되면, 역사는 그것을 다시 현장으로 소환해낸다. 우리가 주류와 비주류, 중심과 변두리, 아방가르드와 아카데미 등으로, 통합적인 인식이 결여된 채 분리하고 대립시켰던 많은 것들이 실은 오류로 인한 쏠림과 그것의 보정을 둘러싼 필연적인 교체에 다름 아니다. 고립된 것은 없다. 여기서 일어난 일은 저기서 영향을 미친다. 추상과 구상의 등장과 쇠퇴, 교체도 이러한 맥락에서 예외가 아니다.
1962년 파리에 정착한 알제리 출신 작가 장 미쉘 알베롤라(Jean-Michel Alberola.1953- )는 1983년 퐁피두센터에서 있었던 전시 《안녕하세요 마네씨》(Bonjour Monsieur Manet)에서 추상회화 한 점과 구상회화 한 점을 걸고, 두 작품 가운데 구상회화에 곧 막이 씌워질 것이라 예고했다. 예고대로 며칠 후에 구상회화 위에 붉은 커텐이 드리워졌다. 구상 회화의 종말에 대한 비유였다. 하지만 구상회화와 조각, 구체적인 형상성의 역사는 오늘날은 물론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문명의 교체, 지적 체계의 교체... 역사의 흐름은 늘 새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패턴(pattern)화된 시간의 규범이 내재한다. 다만 그 형식과 주기 등이 기계적이지 않고, 논리적인 예측을 전복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될 뿐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늘 새로운 것을 염두에 두고 사고하기에 이 법칙을 간과한 채로 사고하고 행위한다. 하지만 그런 사고로는 ‘오늘’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려는 욕망으로 인해, 이미 발견된 것 안에 있는 표현할 수 없는 초월적인 의미를 숙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1] 늘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정신의 가장 실질적인 타락의 유형이다. 오늘날 인식, 태도, 표현의 전반에 걸쳐서 ‘새롭다’의 의미가 크게 잘못 오용되고 있다. 여기서의 새로움은 단지 차이, 즉 이전과 다르거나 다른 것들과 다르다는 것 이상이 아니다. 그런 새로움을 필요충분조건으로 삼는 것으로서 예술 자체가 예술의 오해요 오용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예술이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내리지만, 실은 자아 상실과 불안, 심리적 표류, 덧없고 피상적인 사유, 길을 잘못 들어선 탐미의 표현에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프랑스의 사상가 시몬느 베유(Simone Weil)는 그런 재능을 갖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큰 다행일 지경이라고 냉소한다.
일반적인 것들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이 특별한 인식, 감각, 표현행위로서 예술의 구분은 오히려 현저하게 완화되거나 무효화되었다. 예술도 길을 잃고 잘못된 길로 들어서는 것은 우연이 발생한 사건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새로움의 집착증을 앓는 정신의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새로운 매력, 흥분, 체험을 ‘마치 사냥하듯 하는 추구’는 결국 표류라는 이름의 종착역에 이르는 것 외에 다른 결론을 기대할 수 없다. 게다가 이 표류를 자유와 유사한 대단한 것으로 선언하는 오류를 더 한다. 이러한 사유는 생명의 기반을 허무는 기술적 도구들의 예찬으로 쉽게 기울어진다.
오늘날의 미끄러지는 역사에 크게 기여하는 것이 용어의 그러한 변용이요 혼돈이다. ‘진정성, 혁신, 창의성’ 같은 구호들과 신자유주의의 강령들은 놀라울 정도의 가족유사성을 지닌다. 오늘날 예술적 새로움으로 간주되는 것들에는 신자유주의 경제가 놓은 덫인 ‘항구적인 강제’와 예속이 잠복해 있다. 그 수행은 가치있는 옛것이나 기존의 것을 소외시키고 배제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도록 만든다. 인식은 생산성과 이익 상승의 논리에 위배되는 것을 거침없이 깎아내리도록 재조정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새로움을 추구할수록 더 빠르게 루틴으로 주저앉는다. 늘 새로운 것, 흥분을 일으키는 것을 기대하는 사람은 이미 있는 것을 간과하는 사람이고, 이미 있는 것에 간직된 의미로부터 소외된 사람이다.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는 이런 말을 한다. “옛것은 행복으로 배부르게 해주는 일용할 양식이다. 옛것은 행복을 준다.” “오직 새것에 대해서만 싫증이 나며. 옛것에 대해서는 결코 싫증이 나지 않는다.” 일용할 양식은 찰나에 빛을 발하는 매력은 없지만, 그것 없이는 살 수가 없다. 과거는 정신과 감각의 서식지다. 과거를 잃은 정신과 감각에선 서식지를 잃은 동식물의 위태로운 생명력이 감지된다. 뿌리의 부재! “과거의 전율은 결코 현재의 감각에 기생하지 않는다.”[2] 우리의 감각이 새로움, 매력, 흥분, 오락에 취해 있을 뿐이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다. 우리의 인간적 취향이 고상한 것이라면 그것은 전적으로 그동안 접해온 예술작품들의 덕이 크다. 과거는 새로운 예술이 주는 참신함을 더 많이 느끼도록 하는 중후한 배경음이 된다.
역사의 변곡점, 변화의 때와 방식은 오히려 사소해 보이는 사건들에 의해 그 고유한 운동이 수행된다. 역사는 수구화된 아방가르드의 흐름 한가운데서-모든 수구는 한때 아방가르드였다-, 아카데미즘의 철 지난 가담자라는 오명을 무릅쓰는 사람들에 의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소조를 기반으로 하고, 여전히 1차 노동을 중시하며 트롱프 뢰이를 핵심 미학 기제로 삼는 이용덕의 역상조각에서 이러한 역사의 맥락과 새삼 마주한다. 오랫동안 새로움에 편향되어온 현대화된 감각, 지각과 인식의 병적인 분열에 새삼 눈뜨고 정신을 차리게 된다.
독일 프로이센 왕국의 전쟁 결정을 찬성하는 성명서에 93명의 독일 지성인들이 서명했을 때, 독일의 지성이자 신학자인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이렇게 썼다. “93명의 독일 지성인들이 전 세계가 지켜보는 앞에서 ... 처참한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 명단에 나의 독일인 스승들의 이름이 거의 다 올라와 있는 것을 보고 나는 경악했다.”[3] 바르트의 의구심이 그들의 학문에까지 확장되었다. "이제 나는 독일에 있는 나의 모든 스승들, 그 위대한 신학자들의 가르침에 의심을 품게 되었다. 그들이 전쟁 이데올로기 앞에서 실패했다고 느꼈으며...”, “어떻게 ... 학문이 "모두 지성의 42cm 대포"로 둔갑하는지를 목격했을 때, "나는 이른바 신들의 황혼(Götterdämmerung)을 경험했다."[4]
2. 편견의 연대기
보는 행위의 필연적인 법칙 중 하나인 착시(錯視,illusion)는 정신에 유해하지 않다. 그린버그-폴록’의 축이 주장하는대로 비구상과 추상의 길로 나가는 것이 해독제라는 것은 더 터무니없다. 착시야말로 속임수가 아니라 제대로 보는 것이다. 그것이 올무요 비윤리라는 것은 플라톤주의자들이 헛되이 세워온 부질없는 가설일 뿐이다.
감각에 대한 편견은, 데카르트가 철학에서 감각을 배제한 이후로, 근대 지적 체계 전체의 문제가 되었다. 물론 일찍이 감각을 야만인의 영혼의 특성이라 했던 헤라크레이토스, 존재의 지혜를 얻기 위해선 눈, 귀 모두를 제거하는 게 좋겠다는 플라톤 등이 있긴 했다. 1641년 르네 데카르트는 『성찰록』에서 모든 감각은 틀리기 쉽고, 특히 시선을 통한 이해는 수박 겉핥기에 그치는 경우가 많아 그것을 통해서는 결코 본질에 이를 수 없다고 했다. 데카르트의 회의의 철학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회의해야 할 대상이 감각이었다. 그리고 ‘이성적인 존재가 되려면 감각을 불신하고, 상상력을 배제하고, 정념을 통제해야 한다’는 데카르트주의의 강령 위에서 근대철학의 계보가 정초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데카르트가 범한 오류로 인해 지불해야 할 대가가 결코 적지 않았다. 정신과 신체를 두 동강으로 잘라낸 오류다. 그 순간 정신적인 동시에 신체를 지닌, 살아있는 존재에 대한 사유는 물 건너가 버렸기 때문이다. 현대는 진정성(authenticity)과 본질(essance)에 몰입했지만,[5] 몸 없는 진정성이요 신체를 누락하는 본질이다. 다이엔 애커먼(Diane Ackerman)이 현대의 이론 지식을 ‘감각의 구두쇠’로 함축하는 이유다. 감각을 통한 경험 없이 구축된 세계관과 정체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미래는 위험천만한 것일 뿐이다. “감각의 구두쇠들이 지구를 상속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맨 먼저 세계를 살만한 가치가 없는 곳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다.”[6]
데카르트에 대한 반성이 이번에는 시계추를 덜 심각하다 할 수 없는 반대편으로 이끌었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감각의 논리』는 감각에 대한 또 다른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데카르트주의의 해독(解毒)을 표방하는 현대적인 처방을 지배하는 오해다. 그는 감각을 영혼과 분리해, 이번에는 단백질 덩어리에 갖다 붙였다. ‘둘 중 하나가 옳다’의 측면에선 고전철학의 지루한 연장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이번에는 ‘의심’이 아니라 몸뚱이가 우상이 된다. 고전철학보다 조금도 덜 고약하다 볼 수 없다. 그 안에서 교황은 침팬지가 되고 투우사는 소가 되는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회화에 대한 들뢰즈의 예찬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결론이다. 들뢰즈에겐 그것이 퇴화가 아니라 창조의 가능성이었다. 베이컨이 누구였던가. 푸줏간의 고기를 보며 “저기에 걸려 있는 것들이 왜 내가 아닌가”를 되묻곤 했던 사람이었다.
들뢰즈에게 감각의 탁월성은 인간을 인간과 동물의 공통영역으로 내려보내는 경주에 달려 있다. 누가 먼저 존재를 포기하고 고깃덩어리가 될 것인가의 경주다! 첨예한 미적 감각은 존재를 몸(corps)으로, 몸을 다시 고기(viande)로 신속하게 귀속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그 고기 덩어리들도 변함없이 쉽게 두려움에 떨고 분노하고 폭력에 휩쓸릴 것이다.
3. 역상조각의 의미
3-1. 착시(optical illusion)-원근법(perspective)-눈속임 효과(trompe-l'œil)
시야를 좁혀 지난 반세기 역사의 좌표 위에서 이용덕의 역상 조각을 살펴보자. 해당 시기 한국의 미술 흐름을 주도했던 두 개의 논쟁적 담론과의 상관관계를 통해서다. 첫째는 단연 ‘그린버그-폴록(Greenberg-Pollock)’축에 이르러 극에 달했던 모던 아트의 평면성 이데올로기와의 상관성이다. 그것 '그린버그-폴록'의 축이 ‘착시(illusion)-원근법(perspective)-눈속임 효과(trompe-l'œil)’의 삼각 고리에 걸어놓은 흑주술, 즉 시각 기관으로서 ‘눈’과 ‘보는 행위’에 대한 저주의 주문에 관한 것이다. 그 결과 ‘거세된 시각’의 예찬론을 내세우는 자의적인 소경의 연대기가 출범했다.
이용덕의 역상조각은 모던아트의 강박증이 불러온 이 시각적 거세 3종 세트를 통쾌하게 전복한다. 이 조형론은 구상성(대상과 형상), 눈속임 효과, 착시를 야기하는 3차원과 2차원을 유기적으로 결합하고, 사물에 대한 원근법적 인식에 다시 숨을 불어넣고, ‘그린버그-폴록’축에 의해 생리학적 기관의 딜레마로 규정되었던 재현 미학을 적극 수용한다.
미학적 순수주의 자체가 분열적이고 형용모순이다. 이용덕의 맥락은 이미 프랑스 작가 장 르 각(Jean Le Gac)에서도 공유되었다. 르 각은 당대의 시류를 타는 것에 연연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구상과 재현 미학의 허구성을 비판하는 대열에 앞 다투어 합류할 때 르 각은 허구성의 미학적 잠재성을 피력했다. “내가 하나의 허구를 착상해낼 수 있다면, 나는 내 존재에 대한 하나의 증거를 갖게 된 것이다.” 애당초 구상과 추상, 허구와 실재 같은 것은 상상적 구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 경계가 불분명한 것은 물론이고, 둘 중 어느 하나가 실재나 진리에 대해 무언가를 더 잘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담론들은 대체로 소설에 가깝다. 프랑스의 예술 이론가 카트린 플로이(Catherine Flohic)가 르 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할 수 있었던 이유다. “르 각이야말로 모두가 회화의 죽음을 선언하는 시대에 그 유년기의 진정한 감동에 참여하고 그 삶을 확인하고 즐긴 화가다.” 이용덕의 역상조각의 맥락도 다르지 않다. 흙에서 출발하고, 손으로 조형하고, 눈으로 소통하고 즐기는 조각의 시대가 지나갔다고 모두가 말하는 시대에 이용덕은 오히려 조각의 유년기와 청년기로 돌아가, 그곳에서 흙을 느끼고, 손으로 기도하고, 눈으로 유희했다.
3-2. 시각의 은총
두 번째는 이용덕의 구상 조각이 그의 당대를 뜨겁게 했던 참여적 사실주의와는 다른 사실주의를 추구해왔다는 점이다. 이용덕의 구상은 라공이 말한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논쟁적 형상을 그림으로써 정도를 걷고 있다고 믿는” 사실주의와는 궤를 달리해 왔다. 이용덕의 인식은 니체의 것보다는 예컨대 모방이론의 창시자인 르네 지라르(René Girard)의 것에 가깝다. 지라르에 의하면 일상이야말로 참된 위대성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다. 지라르는 말한다. “광기에 휩싸여서 우리 세상의 참된 위대성을 비난하는 니체는 스스로 자멸할 뿐 아니라…”[7] 니체주의 사상의 종국은 실제 역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국가사회주의 같은 끔찍한 파멸에서 멀지 않다. 오늘날 니체주의의 망령이 되살아나기라도 한 듯, 디오니소스와 오이디프스를 뒤섞어 반죽해낸 듯한 무책임한 수사들이 난무하는 것을 보면 아이러니하다. 이러한 철학은 외로울 겨를이 없는데, 왜냐하면 그들 주위로 그런 생각을 실현하려는 ‘진짜 정신없는 자들’이 몰려들기 때문이다.
이용덕의 역상조각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어떤 과도하거나 치우친 인식 없이 소박한 노동과 놀이에 집중한다. 멀어지는 듯하면서 정작 다가오는, 먼 곳을 응시하는 듯하다 어느덧 이곳으로 향하는 시선과 함께, 사람들은 저마다의 일상을 살아간다. 파스텔 톤의 차분함과 정지상태의 동작이 회의주의에 물들지 않은 일상의 가치를 넌지시 설득한다. 시각적 유희와 모험에 집중하기 위해 채도가 낮은 파스텔 톤의 색이 주로 사용된다. 붉은 빛을 보고 있을 때는 뇌가 흥분하여 악력이 13.5% 증가하는 반면, 푸른 계열의 색은 뇌의 흥분을 진정시킨다. 따듯하고 은은한 분위기가 디오니소스와 오이디프스의 유입을 통제하는 방어기제로 작동한다.
이용덕의 역상 조각은 보는 행위 자체, 그 본연의 의미, 기쁨의 순간에 머문다. 라공의 말이다.
“... 눈의 즐거움의 권리, 시선의 기쁨을 향한 즐거움, 어째서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포기해야만 하는가? 어째서 우리는 그러한 권리들을 향유해 본 적도 없는 우리의 이웃에게서 그것들을 빼앗아야 하는가?”
보는 것은 그 자체로 은총이다. 그것의 한계는 그것의 가능성의 다른 이름이다. 1829년 괴테는 색의 이론을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사람들은 헛되어 현상 너머에서 찾는다. 그러나 사람들이 찾는 것은 현상 자체 속에 있다.”[8] “뇌는 눈멀고, 귀먹고, 말을 못 하고, 느끼지도 못 한다. ... 감각이야말로 우리를 여태까지 살아온 모든 이들과 연결해주는 유전의 사슬의 연장이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과 모든 우연한 사건을 넘어 우리를 다른 사람들, 동물들과 연결시켜준다.”[9] 이용덕의 인식이 이와 다르지 않다. 조각의 반전인 역상조각에서 그 역상성을 이끄는 힘은 시각 본연에의 천착에 있다.[10]
역상조각은 지난 반세기 한국미술을 주도해온 두 흐름의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하지만 조용히 당대의 주류에 균열을 내면서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해 왔다.
3-3. 역상성의 시각적 의미
비물질과 부재의 역상조각은 두 요인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감상자의 시선에서 가까워지면서- 함몰되면서- 형성되는 부재, 즉 비어있는 비실재의 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그 위에서 역상성의 연장이자 강화 기제이기도 한 2차원의 회화적 지지체다. 이로 인해 역상 조각의 미학적 기제가 극적으로 작동한다. 회화적 지지체는 물리적 지지체를 넘어 시각적 드라마의 강도를 확보하는 능동적 기제로서 기능한다. 3차원과 2차원의 상호작용으로 역상성이 더욱 강조되는 것이다.
감상자의 시선은 대상의 돌출과 함몰을 구분하기에 어려움을 겪는다. 함몰부에서 돌출을 보고, 돌출부는 함몰로 읽힌다. 그것은 함몰과 돌출의 혼선, 원근법(遠近法)적 카오스, 보는 것(seeing)의 일시 장애인가? 하지만 어떤 주관도 전달하지 않고, 어떤 특정한 관점에도 오염되지 않는 순수하게 시각적 인지, 모색의 긴장 즉 보여지는 것을 극복하는 보는 것으로 사실의 세계로 나가는 시각의 본래이다. 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과의 관계에 놓여 있다. 같은 대상에서 사람마다 다른 것을 본다. 잘 볼 수도, 잘못 볼 수도 있다. 깊이 보거나 피상적으로 볼 수도 있다. 반대로 잘 생각하지 못하거나 잘못된 생각은 잘 보지 못하는 것과 언제나 결부되어 있다. 오늘날 보는 것은 광고와 미디어를 통해 변질되고,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달리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다. 역상 조각에서 시선은 진출과 후퇴 사이, 존재와 부재가 시각적으로 혼융된 빈 공간을 특별히 즐긴다. 물질이자 비물질인 역상의 형(形)과의 놀이를 즐긴다. 대기는 부재가 아니라 5조 톤에 달하는 무게를 지닌 무언가로 가득 차 있는 물질계다. 무심결에 ‘텅 비었다’고 말하지만 대기는 물질로 가득 차 있다. 시선은 그러한 대기의 조건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고, 그것과의 관계 속에서 사물을 탐색하고 간파하며 음미한다. 대기의 저항을 감지하면서, 마치 분지에 부는 바람의 줄기들로 사물을 촉각하는 것처럼, 시선도 공기의 진동, 입자들의 파동을 감지하면서 사물의 표면을 쓰다듬는 것이다. 바람의 신 아이올로스가 거주하는 동굴을 탐색하는 것과도 같은 모험이다. 물질과 대기, 존재와 부재의 불분명한 경계는 시각의 촉각적 본성을 오히려 자극하고, 드디어 사유를 잠에서 깨운다. 보는 것은 늘 기관 이상의 차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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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심상용은 서울대학교 회화과, 대학원 서양화를 전공하고, 파리8대학교 대학원에서 조형예술학 박사, 파리1대학교대학원 미술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미술관 관장,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또한, 서울시립미술관 운영 자문위원(2018~) 이다. 그의 주요저서로는 『인생에 예술이 필요할 때』(2020), 『아트테이너: 피에로에 가려진 현대미술』(2017) 등이 있다.
[1] 시몬느 베이유, 『중력과 은총』, 윤진 옮김 (서울: 사회평론, 1999) p.199.
[2] 파스칼 브뤼크네르,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 이세진 옮김 (서울: 인플루엔셜, 2023) pp.114-115.
[3] 칼 바르트, 「W. Spoedlim 에게 쓰는 편지」. 1915년 1월 4일,
[4] 칼 바르트, 뮌스터 대학교 개신교 신학과 기념앨범 자서전적 텍스트(Autobiographische Texte). 1927.
[5] 마크 스미스, 『감각의 역사』, 김상훈 옮김 (서울: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10) p.59.
[6] 다이엔 애커먼, 『감각의 박물학』, 백영미 옮김 (작가정신, 2023), p.442.
[7] 르네 지라르,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본다』, 김진석 옮김 (서울: 문학과 지성사, 2004) p.219.
[8] 다이엔 애커먼, 앞의 책, p.514.
[9] 앞의 책, p.524, 526.
[10] 심상용, 「생의 예찬, 그리고 네거티브의 미학과 인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