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조각 2009
활주로의 끝에 서서
90년대 초반, 나의 작업 공간에서 나는 마치 새로 태어난 아이처럼 모든 선입관을 지우고 작업실을 둘러 본다. 많은 것이 있지만 그 중 각목 하나가 길게 바닥에 누워있는 것이 눈에 띈다. 다가가서 든다. 막대기가 한쪽으로 기운다. 나는 천장에서 줄을 내려 막대기를 중심 잡아 바닥에 가깝게 매단다. 신비하다. 균형을 잡은 막대기는 작은 공기의 흐름에도 서서히 돌고 있다. 균형의 긴장감은 너무도 아름답다. 양쪽 끝에 다른 막대기들을 올려 놓는다. 그 위에 또 다른 막대기들을 계속해서 올려 놓는다. 균형 잡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균형이 잡히기만 하면 어김없이 신비한 공간으로 빨려 드는 듯 하다. ‘시간이 멈춘 듯 한데 공간은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 온 바닥에 펼쳐져 가득 메운 막대기들은 고요 속에서 정지한 듯 바닥 위에 떠서 흐르고 있다.
‘감각’이다. 내가 그냥 그것을 감각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의 사라짐’, ‘공간의 흐름’, ‘내가 여기 서서 그것을 보고 있다는 사실’, ‘저 얼기설기 얽혀 균형 잡힌 막대기가 스스로 그렇게 존재한다는 경이감’, ‘매우 일상적 사건이지만 결코 일상적이지 않은 신비감’이다.
마치 닫힌 실내에만 있다가 무심코 밀어본 문이 열리며 거대한 바깥 풍경이 눈에 들어오는 기분이다.
지금은 ‘역상조각’이라고 이름이 붙여졌지만, 80년대 중반부터 시작한 이러한 기법의 모색들이 기억 난다. 당시 작품들에서는 인체 중 어느 한 부분만을 안으로 들어가게 표현하여 전체적으로 보면 시각적으로 완전한 인체의 모습으로 보이는 것들이다. 이를 가까이 다가와 보면 positive와 negative가 섞여있어 알아보기 어렵게 왜곡된 것 들이었다. 그때는 한 형상을 표현하는데 음과 양이 모두 섞여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을 증명해 보이려는 욕심이 크게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감각’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니 모든 것이 자유롭다는 생각이 든다.
역상조각은 negative로 들어간 모습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시각 현상이 있다. 이러한 일루젼은 단지 감각의 유희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 현상을 바라보고 느끼는 순간 관찰자는 역으로 자신의 존재가 그 앞에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사실 ‘환영’은 보는 사람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은 커피 속의 설탕 같은 것이라 만약 이것을 빼더라도 커피일 수 있으나 만약 설탕에 매료되어 커피를 넣지 않고 마신다면 그것은 더 이상 커피가 아닌 설탕물이 되는 것이다.
자신을 감동시킨 풍경 사진들을 모아놓듯이, 나의 마음에 들어온 일상의 모습들을 시간으로부터 떠난 공간 속으로 [저장 save]해 놓는 일에 몰두한다. 이렇게 저장된 것들은 마치 ‘기억’처럼 부재를 통한 존재로 인식되는 것이다. 평면의 박스에 오목 안으로 들어간 사람의 모습은 엄밀히 말해서 그 사람만 빼고 주변만이 있는 것이며, 그 빈자리를 통해 역으로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완전히 다른 것처럼 보이는 이 두 인지의 방식 사이에는 매우 얇은 경계가 있다. 이를 중심으로 안과 밖이 나눠지는 문지방 같은 것이다. 일상에서 이러한 전환의 경계를 자주 만난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리고 있다. 활주로의 끝에 다다르면 이제 바퀴를 접고 허공을 날아야 한다. 활주로의 끝은 문지방처럼 두 다른 차원으로 전환시키는 경계인 것이다. 이 활주로의 끝에 서서 양 세계를 함께 바라본다.
이용덕 작가 노트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