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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의 수용과 상상화된 세계에의 자기동화

 

일상의 회상과 기록으로서의 조각작업

 

최 태 만(미술평론가)

보는 것이 곧 소유하는 것이란 지각심리학적 가설은 그 소유가 기억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이 기억은 한 미술가의 성장배경과 사회적 체험, 기질, 특별히 인상에 남을만한 사건 등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서 일면 불연속적이고 피상적인 단편들의 집적물이거나 혹은 불완전한 구조와 같은 것이지만 그 내면에는 상당히 논리적인 고리에 의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특정한 기억에는 항상 특정한 장소(공간)과 그것과 연결된 특정한 시간이란 것이 작용하기 마련이다.

 

이용덕의 작업에 있어서 "기억"이란 이러한 공간과 시간의 기록이란 점에서, 나아가 자신의 기억인자 속에 각인된 특별한 정보와 잠재된 욕망의 포착이란 의미에서 다분히 명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게 만든다. 그러나 그가 추구하고 있는 형상의 세계는 단지 특정 사건의 물리적인 기록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의미구조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필연적으로 수많은 추측과 해석을 요구하며, 또한 우리를 혼란스럽고 당혹하게 만드는 특징까지 지니고 있다. 이러한 혼란스러움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그가 과거의 단속적인 기억들을 마치 큐빅게임을 하듯 매우 세심하고 조심스러운 방식으로 조립하고 재구성하여 새로운 볼거리 (spectacle)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에게 특별한 흥미와 자극, 주목거리를 제공해 주었던 각종 정보 중에서 작업이란 인출과정을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재구성된 기억의 기록이란 맥락으로 볼 때, 유럽여행 중에서 특히 로마에서 받았던 강렬한 자극과 인상을 기념비적인 형식으로 형상화한 (로마)와 근육질의 건강한 남자의 상반신과 그 내뻗은 팔뚝에 너무도 선명하게 부각되고 있는 '1988'이란 숫자를 통해 온 나라를 마치 집단무의식에의 도취상태로 내몰아갔던 올림픽을 상기시켜 주는 (올림픽의 매력), 그리고 지극히 사적 (私的)이고 상상화된 세계에의 내밀한 여행을 꿈꾸고 있는 (아버지의 마을)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작품들이 개인사적 체험에 바탕한 정보의 적극적인 재조직, 즉 기억의 회상이라면 (아가사크리스티를 위하여), (한국근대사), (태극인)등의 작품은 앞의 것보다 훨씬 관념화된, 즉 교육이나 사회적 관습 등 오랜 시간을 두고 자극 받고 또한 그 시간의 흐름에 의해 단순화, 첨삭, 왜곡된 나머지 그 자신의 경험과 태도, 취향에 의해 하나의 문제의식으로 성장해 버린 '만들어진 기억'에 대한 일종의 무의식적인 집착에 이끌려 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별한 사적 체험으로부터 연원한 기억의 인출이든, 의식의 저편에 잠재된 욕망의 심연으로부터 끄집어낸 것이든 미술가의 기억 속에 저장된 이미지를 돕는 보조물로써 투사(投射)는 상당히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바 이용덕에게 있어서 투사는 만듦과 맞춤이란 방법에 의해 드러난 형상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매개체란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로마)에서 이 명제자체가 나타내는 기표(signifiant)는 특정한 도시를 드러내 주고 있지만,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구조는 그 기표 속에 감추어진 기의(signifie)를 암시해 준다. 즉 로마란 제목은 그가 유럽여행 중에 받았던 특별한 기억을 수많은 정보의 창고로부터 '끄집어내는 출발점임을 지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드러난 기억의 기록이지만 그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축적적이고 조립형의 구조는 로마란 한 도시에 대한 인상 너머 그 도시가 환기시켜 주는 여러 가지 역사적, 사회적 의미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피에타와 계단, 양각으로 부조된 말은 서로 관련이 없는 형상이면서도 고대 로마제국의 어떤 기념비를 떠올리게 만들고 있다. 그는 각기 독립적으로 제작된 이 형상들 속에 그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로마에서의 기억을 투사시킴으로써 이 작품 전체가 한 도시에 대해 여전히 뇌리에 남아 있는 여러 인상을 조합하여 상상화 된 형상의 세계를 구축하고 그 속에 다시금 로마란 도시를 투사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축소된 기념비임과 동시에 양각 부조와 음각 부조의 조립은 부흥과 몰락이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작가 자신의 감각적(지각적) 반응을 드러내주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이러한 대립된 구조 (양각과 음각, 정밀한 사실적 소조와 생략과 왜곡)의 병치는 그의 작품에 문학성을 배가시키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즉 연출적 공간의 구성과 배우의 연기장면을 연상시키는 각 인물들의 개별적인 심각성은 이 작품들이 단일한 재료와 점유된 공간에 의해 어느 한 순간으로 고착되어 버린 정지된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연극이나 영화처럼 일정한 줄거리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시간의 흐름 속에 지속적인 운동을 요구하고 있는 듯한 효과를 거둘 수 있도록 의도되어 있다. 이러한 연극 연출적 요소를 더욱 고조시키는 것으로서 그의 작품에 항상 도입되고 있는 벽의 이미지는 마치 특정한 상황을 압축시켜 놓은 무대와도 같은 것이면서 동시에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도록 유도하고 있다.

 

예컨대 벽은 다분히 이중적인 의미구조를 형성하고 있는바 그의 작품에서 이것은 심리적으로 차단, 단절, 고립, 유폐, 장막을 떠올리게 만들면서 한편으로는 노출로부터의 보호, 은폐, 안식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보는 사람의 시점을 끌어들이는 무대장치이기도 하면서 그들과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자 하는 욕망의 징표이다.

 

그런 점에서 이 벽의 이미지는 양각과 음각이 지닌 의미만큼이나 심리적으로 상호 모순 된 상황을 상징적인 방식으로 반영한 것이면서 보는 사람의 상상력의 침입을 위해 비워놓은 여백이라고 할 수 있다.

 

모순의 수용

 

만듦(소조)과 맞춤 (그는 별개의 작품으로 만들어 놓은 작품을 어떤 작품의 상황 속에 끼워 넣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의 방법이 그의 작품을 문학적으로 파악하게 만드는 요인인 바 재현적인 조각 작품이 필연적으로 수많은 해석을 가능하게 만든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요인으로 하여 그의 작품이 다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해석 가능성 중에서 보는 사람의 기대감과 일치하는 하나의 해석을 선택하는 것은 언제나 보는 사람의 몫이기도 하다.

 

 더불어 양각과 음각의 적절한 혼용은 시각적 착시효과를 위해 의도된 조형발상이라 할 수 있는데 이와 같이 대립적인 구조가 주는 조형적인 재미는 (여성의 집착), (휴식), (자아의 해방)등의 작품에서 더욱 두드러진 효과를 획득하고 있다. 예컨대 (휴식)이란 작품을 보면 노동 뒤의 피곤한 육신을 벽에 기댄 체 망연하게 앉아있는 남자의 상반신이 음각으로 소조되어 벽 속에 들어가 있고 팔꿈치로부터 하반신은 완전한 환조로 제작된 것인데 멀리서 눈을 지그시 감고 그것을 보면 - 마치 환조와도 같은 입체감을 느끼도록 만든다. 이와 같은 착시효과는 우리의 길들여진 눈이 가진 편향된 감각 - 조각 작품은 삼차원적인 입체여야 한다는 선입견이 얼마나 표현의 폭을 협소하게 축소시키고 있는가를 깨닫게 해준다. 나아가 음각과 양각은 동양사상의 핵심적인 개념인 음양의 조화와 통일을 지향하고 있어 보는 재미 이상의 사변적인 속성까지 드러내준다. 즉 그가 이번 전시회의 주제로 설정하고 있는 모순의 수용이란 개념을 주목해 볼 때 그의 작품 속으로 관류하는 세계관이 어떠한 것인지를 간파하게 만든다. 주체와 객체, 선과 악, 진실과 위선, 삶과 죽음, 안과 밖, 빛과 어둠, 남과 여 등의 상대적인 제반 요소들은 세계를 형성하는 중요한 측이면서 이 세계를 바라보고 파악하며 비교, 분석, 해석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 준다. 미완성이 있기에 완성이란 개념이 성립될 수 있으며 상호 모순 된 대립적 구조가 통일성을 획득할 때 우리는 완전한 실체에 대해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이러한 대립의 적극적인 수용을 지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에게 주어진 삶의 수용은 곧 모순의 수용이며, 그것은 단순히 수동적인 맥락에서의 회피나 포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모순의 수용은 통일에로의 전환을 위한 과정이며, 음양사상에서 핵심적으로 다루고 있는 합일 (合一)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그의 작품이 일면 매우 사변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상대성에의 자기동화 때문인 것이다. 그의 작품(자아의 해방)에서 부각되고 있는 이중성은 내면적인 모순과 갈등, 환희와 분노, 쾌락과 절망 등의 복잡하고 다층적인 심리상태와 자아의식에 대한 심리적인 고백이며, 무의식의 심연 속에 잠겨있는 인간의 공격적 속성조차 수용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자기자신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하여 조용하게 일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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