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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당하는 환영(幻影): 이용덕의 2.5 차원 조각

 

케이트 림, 아트플랫폼아시아 대표

 

이용덕의 역상조각을 처음 본 것은 2007년경 이었다. 그의 작품은 충격적이면서도 신기했다. 멀리서는 양각부조처럼 보이는데, 가까이 다가가든지 옆으로 비껴가면 고혹적인 이미지가 확 허물어지면서 찰나의 꿈에서 깨어난 것 같았다. 당시 이용덕의 역상조각은 국제비엔날레와 해외 주요 미술관에서 초대받는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국내에서도 역시 중요한 전시에 많이 초대받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전시기획자나 미술애호가들은 이용덕의 작품을 깊이 주목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이용덕의 작품은 당시 국내의 주류 비평가들에게는 관심 밖의 작업으로 취급 받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보기에 가장 큰 이유는 이용덕의 역상조각은 환영(幻影, Illusion)을 포함하고 있는데 주류 평론계는 환영을 전근대적인 기법으로 치부하고 평가절하하기 때문인 듯했다. 이번 토탈미술관에서 개최한 “이용덕의 역상조각–순간의 지속” 심포지엄은 그 동안 국내 비평 계에서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역상조각의 미학적 해석과 미술사적 위치를 재평가해보자는 목적으로 열린 반가운 시도이다. 나는 그 ‘다시 보기’의 핵심에 환영이 놓여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눈 속임은 가라”: 현대미술 비평의 교조적 주문

근대미술론은 현대미술 비평의 정신적 교복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근대 미술론에 따르면 미술의 역사는 ‘낙후한 전근대’와 ‘진보한 근대’가 엄청난 협곡을 사이에 두고 쪼개져있다. 그 전에는 미술가들이 자신의 기술과 재능을 성직자, 왕족, 귀족, 부르주아의 취향과 필요에 맞춰 사실주의적 회화나 조각을 주로 만들었지만, 19세기말 인상주의를 필두로 그 협곡을 뛰어넘고20세기에 들어서 근대로의 대 탈출이 전세계로 퍼졌다는 것이다. 덕분에 미술가들은 과거의 구속에서 해방되어 표현적이고 지적인 작업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됐다는 영웅적 서사가 따라 붙는다. 전근대와 근대 사이에 큰 변화가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여기에 반대할 사람도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현대미술비평이 협곡 너머 과거 미술을 관찰할 때 사용하는 망원경에 큰 결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망원경은 한 쪽 눈을 감고 있다. 과거미술에서 사실적 묘사라고 하는 것이 실제로는 3차원의 실재세계를 2차원 캔버스에 구현하는 과정에서 원근법과 명암을 이용하여 환영을 만들고 완성해 나간 결과였고 그것이 회화에 본질적으로 중요한 발명이었다는 사실을 제외하는 렌즈가 장착 되어있다.  이 망원경은 환영을 없애고 실물을 해체한 듯한 피카소와 같은 그림만을 ‘진보’라고 보는 렌즈만 갖고 있다.  그래서 아기예수를 안고 있는 마돈나를 묘사한 성화에서 여성의 옷 주름이 종이를 구겨놓은 것처럼 딱딱하고 어색하던 것이, 수 백 년의 진화 과정을 거쳐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이르러 비로서 자연스러운 주름과 부피감을 가진 이미지로 발전한 것을 아예 쳐다볼 수가 없다.[1]   

 

이 망원경을 사용하는 비평가들의 뇌에는 미술적 탁월함이 실재(實在)처럼 그리는 것이 아니라 뭔가 새로운 것을 내놓는데 달려 있다는 개념이 전진배치 된다.  그래서 근대로의 전환을 통해 사실주의 묘사가 부정되고 다음단계로의 혁명적 도약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게 된다. 20세기를 질주하면서 현대미술계는 환영을 이용한 사실주의 청산을 더 강도 높게 부르짖으며, 필수불가결한 요소만을 남기고 나머지는 제거해야 한다는 ‘회화의 축약’까지도 주장하게 됐다. [2] ‘소거해야 할 목록’에는 작품에 남는 작가성(authorship)까지도 포함하게 됐다. 그래서 수공(手功)은 작가의 개인적 속성을 드러내는 ‘위험성’을 지녔지만, 공장에서 만드는 작품에는 작가의 감정적, 심리적 군더더기가 없이 개념적 날카로움이 빛난다고 평가하는 상태로까지 갔다.[3] 반(反)환영과 단순화 경향은 조각에도 영향을 미쳤다.  모더니즘의 이상을 충실히 실현한 작품이 되려면 조각의 전통적 인물묘사를 가차없이 포기하고 공간을 점하는 물질적 부피감도 많이 버려야 했다.

 

이용덕의 자살 당하는 환영

그러나 나는 이러한 현대미술담론이 미술을 바라보는 매우 단세포적인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과거 미술을 단순히 청산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들의 창조적인 선택과 노력을 통해 미술은 꾸준히 진화하며 축적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미술작품들이 오랜 시간을 거쳐 연속성을 가지며 우리에게 역사의 유산으로 남아있게 된다. 이용덕은 비평 계의 눈치를 보며 ‘자기검열’을 하는 작가가 아니었다.  현대미술비평이 찡그리는 환영, 손 작업, 구상적 이미지를 모두 담아 예기치 못한 관계로 융합해서 흥미로운 반전(反轉)을 제공했다.  내가 이용덕의 작품에 끌린 것은 전근대와 근대를 분리해서 보는 현대의 망원경과 상관하지 않고 미술작품의 보편성을 아름답게 구현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역상조각을 가장 단순하게 표현하면 음각으로 파인 조각이다. 그 음각을 가까이에서 보면 무슨 형태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일정한 거리를 두고 특정각도에서 바라보면, 실재 같은 입체감을 불러일으키는 양각적 이미지가 눈앞에 나타난다. 음각으로 파인 무의미가 양각이 주는 의미로 마술처럼 변한다. 또 양각에서 음각으로도 변신한다. 멀리서 볼 때는 입체감 있는 이미지였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무엇인지 알아볼 수 없는 푹 꺼진 모습으로 바뀐다. 이용덕의 역상조각에서는 ‘음각적 구축’과 ‘양각적 환영’이 자웅동체(雌雄同體)로 존재한다.  

이 역상조각에는 놀라운 특징이 있다.  작품을 음각으로 만드는 사람은 작가이지만 양각의 환영을 만들고 부수는 신(神)은 관객이다. 관객은 자기가 서있는 특정위치에서 어느 순간 갑자기 등장하는 환영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 환영을 보고 “저게 뭐지?”하고 호기심으로 다가가면 환영은 사라진다. 관객의 호기심과 접근 때문에 자살 당하는 이상한 환영이다. 일정한 거리와 각도라는 특정조건에서는 선명한 이미지로 태어나지만 그 조건을 떠나면 가차없이 죽어버린다.  이용덕의 역상조각은 환영 자체를 강조했다기보다 환영의 탄생과 소멸에 관객이 직접 개입하는 경험을 제공한다는데 더 큰 의미가 있는 것 같다.  환영의 탄생과 소멸에 개입한 관객은 놀라면서도 즐거움을 느낀다.  역상조각 가까이에 가면서 양각이 아니라 음각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라게 된다.  환영이 포착되는 쾌적구역을 떠나자마자 움푹 파인 구덩이 같이 바뀌며 이미지가 자살한 것을 보고 허망하게도 느낀다.  조금 전에 분명히 보았던 ‘진짜’를 기억하는 마음이 자신의 귀에 대고 진짜였다고 계속 속삭이고 설득하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하지만 자살의 발견이 관객을 우울하게 하지 않는다. 반대로 즐겁고 유쾌한 기분을 불러 일으킨다.  역상조각 앞으로 가봤다가 다시 뒤로 물러나며 보기를 반복하면서 양각적 환영을 음각으로 구축한 역상조각의 구조를 자발적으로 발견하는 자신에게 스스로 경탄한다.  이용덕은 평론가나 큐레이터의 분석적인 설명에 기대지 않고 관객이 스스로 실험하고 관찰해서 역상조각의 비밀을 직관적으로 풀어내는 무대를 만들어준 것이다. 나는 이러한 즐거움이 미술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미술작품을 보면서 작가가 어떤 흥미 있는 발견을 했고 그것을 어떻게 비범하게 예술적으로 포착했는지를 느끼고 깨닫는 과정은 마치 어떤 어려운 문제를 해결한 듯한 성취감과 기쁨을 준다.  이 기쁨은 삶의 에너지를 보강해 주고 우리의 발걸음을 미술로 지속적으로 향하게 하는 힘이 되어준다.  비엔날레 같은 국제전시장안을 거닐다 보면 작품자체를 보고 이해하고 즐거워하기보다 옆에 있는 설명을 읽으면서 억지로 작품의 의미를 공부해야 하고 그 글을 통해 공감을 강요 받는 적이 많다.  이렇게 몇 분의 ‘억지’를 부리다 보면 미술작품을 보는 자발성과 기쁨이 없어진다. 이용덕의 역상조각과 같은 작품을 이해하고 즐기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그저 세심하게 보고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뇌가 사물을 인식하는 일반적인 과정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인간의 뇌에서 시각령(視覺領, visual cortex)은 뇌의 4분의 1을 차지한다. 인간은 시각적 존재(visual creature)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신경미학자인 세미르제키(Semir Zeki)는 시각이 인류가 세상에 대한 지식을 얻는 가장 효율적 수단이고 시각령은 단순히 보는 것만이 아니라 보는 대상을 개념화하는 능력까지 갖고 있다고 한다.[4] 미술을 보면서 우리의 뇌는 생각하고 해석하는 매우 고급의 지적 활동도 동시에 한다 .  

 

 

이용덕의 유레카

이용덕도 처음에는 현대비평담론처럼 지적으로 파악되는 작품의 의미를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1990년대 초 베를린 작업실에서 여러 미술실험을 하면서 현대 뇌과학의 발견과 비슷한 유레카의 순간을 경험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관념적 구호를 외치는 것 같은 작업의 연속은 나를 지치게 했고 공허하게 만들었다”면서 “내가 드러내고자 한 의도를 감상자가 이해하는 그 순간 그 작품은 폐기되는 기분을 느꼈다”고 말한다. “마치 작품이 메시지나 감성전달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작업실에 있던 6미터 가량 긴 나무막대기를 천정에 줄로 매달아 균형을 잡아 보았다.  그 막대기는 미세한 공기의 흐름을 느끼며 천천히 회전했고, 이용덕은 그 균형의 긴장감을 너무나도 아름답게 느꼈다.  그 막대기의 양쪽 끝에 다른 막대기를 올려 보았다.  균형을 잡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균형점이 맞기만 하면 “정지된 시간 속에서 새로운 공간이 지속적으로 전개되듯 어김없이 신비한 공간으로 빨려 드는 것 같았다.” 그는 이러한 “시간의 소멸”과 “공간의 흐름”의 감흥에 빠져 며칠을 보냈다.  그 감흥은 “일정한 텍스트를 통해 인식한 것”이나 “심오한 진리의 발견에서 온 것”이 아니었다.[5] 그는 이 일시적이지만 강렬한 감흥과 감각을 작품에 구현해보려고 새 출발했다. 그는 베를린에 오기 전 1980년대 중반 한국에서 실험적으로 만들어 봤던 작품을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작품에서 인체의 일부는 음각으로 처리하고 다른 부분은 양각으로 처리했었다.  작가인 자신은 음각과 양각의 차별화에 더 매어있었는데 신기하게도 관객은 음각부분도 양각으로 읽어내는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그는 베를린에서 이러한 음각과 양각의 관계를 여러 각도에 추적하고 실험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 “Aphasia-Interview”라는 작품을 1999년에 내놓았다.  사람이 의자에 앉아있는 옆 모습의 몸체부분을 레이저로 잘라내서 몸체부분은 왼쪽에 배치하고, 몸체를 빼내고 남은 부분은 오른쪽에 앉혀놨다. 하나의 철판 바탕에서 나온 두 형태가 마주보며 앉아있다.  관객은 빼낸 철판의 양각으로 만든 왼쪽사람 이미지와, 철판이 빠져나간 음각으로 만들어진 오른쪽 사람 이미지를 번갈아 바라보게 된다.  흥미롭게도 관객은 포지티브(positive)건 네거티브(negative)건 앉아있는 두 모습을 똑 같은 사람이라고 인식한다. “Aphasia-Interview”를 보면 이런 질문이 스쳐간다.  어느 것이 이미지를 인식하는데 더 중요한 것일까?  왼쪽의 포지티브인가, 오른쪽의 네거티브인가?  아무리 보아도 어느 것이 더 본질적으로 혹은 더 우월하게 대상을 드러낸다고 판단할 수 없다. 둘은 동가(同價)이다.  무승부를 선언하는 관객의 판단은 정당하다.  관객의 시각과 마음이 음각으로 남겨진 텅 빈 공간을 알아서 채워 넣어 양각으로 해독하기 때문이다. 이용덕의 역상조각은 양각과 음각을 각각 나눠서 보여준 “Aphasia-Interview”의 실험을 한 차원 높여 음각과 양각을 일체화했다.  인간의 시각이 음각이라도 양각이라고 너그럽게 수용한다는 경험을 새 작품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  이용덕은 전통적 조각방법대로 점토를 이용해 양각으로 1차 모델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양각을 캐스팅해서 양각과 맞닿아있던 부분을 음각조각으로 떼어내 양각이 있었던 흔적을 양각의 환영으로 빚어냈다.  음각적 구축을 양각적 환영으로 전환하는데 중요한 요소는 빛이다.  빛은 표면에 닿으면서 밝은 면과 어두운 그림자를 만들어 우리에게 입체감을 준다.  역상조각의 음각 구덩이에 만들어진 기복과 굴곡에 빛이 닿으면서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생기고 이 명암이 모이면서 순간적으로 또렷한 윤곽선이 만들어진다.  사실주의 미술에서는 화가가 색의 톤을 조절해 음영을 통해 입체감을 만들어냈다.  이용덕은 대신 음각으로 남겨질 때 어떻게 보일 것인가를 상상하고 예측하면서, 캐스팅하는 양각의 높낮이와 각도를 조절한다.  그리하여 음각과 빛이 대화를 하고 관객 은 이를 양각적 환영으로 읽어내는 것이 역상조각이다.  

 

 

2.5차원의 조각

나는 역상조각을 볼 때마다 회화를 꿈꾸는 조각이자 조각을 꿈꾸는 회화로 느껴진다.  이용덕의 역상조각은 일반적인 3 차원적 조각의 틀에 넣어서 설명할 수 없다.  음각 구덩이에서 태어난 허구적 입체이기 때문이다.  관객은 음각이 양각적 환영으로 드러날 때 미묘한 음영과 윤곽선으로 구성된 그림 같은 이미지를 보게 된다.  음각부분만 홀로 떠있다면 그렇게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색으로 칠한 배경이 음각을 받쳐주기 때문에 한 폭의 그림같이 보인다. 일반조각은 3차원에서 끝나지만 역상조각은 2차원의 세계로 한 발을 들여놓고 있다. 그렇다고 역상조각을 회화라고는 할 수 없다. 회화는 2차원적인 수단, 즉 색깔의 음영을 통해서만 입체감을 구현하지만 역상조각은 움푹 파진 음각이라는 3차원의 배경위에 각도와 높낮이, 색깔 등을 결합해서 회화보다 강렬한 입체감을 만들어 낸다. 회화의 2차원 입체감은 정지되어 있지만 역상조각의 입체감은 보는 위치에 따라 생겨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는 생명체이다.  2차원에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아무리 입체감을 잘 표현한 회화라도 3차원 수단을 직접 동원한 역상조각의 입체감에는 견줄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이용덕의 역상조각을 2.5차원의 조각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본 것이 회화인가, 조각인가?”라는 의문을 불러일으키고2차원과3차원의 중간쯤 어디에선가 우리와 눈을 맞췄다가 홀연히 사라지기도 한다. 2.5차원이라는 느낌은 우리가3차원에서 일어났던 어떤 사건을 기억할 때, 3차원의 모습으로만 남지 않고 2차원적인 이미지로 많이 기억되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우리의 기억은 회화와 조각을 둘 다 소장한 미술관과 비슷하다. 어떤 것은 회화적 이미지로, 어떤 것은 입체적 이미지로 재구성해서 간직한다.  또한 어떤 때는 회화적 이미지와 입체적 이미지가 동시에 보이도록 하는 특별한 ‘큐레이팅(curating)’도 한다. 내 생각에 역상조각은 이러한 기억의 방식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열어놓은 완성

이용덕의 역상조각은 2.5차원에 걸려있기 때문에 전통적인 미술작품 분류에 끼워 넣기 어렵다. 환영을 부수고 발가벗겨 극도의 축약을 지향하는 현대미술담론의 흐름에서도 이탈해있다.  역상조각에 대한 비평가들의 평가가 별로 많지 않은 것은 그 흐름에서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역상조각에게는 매우 강력한 아군(我軍)이 있다.  바로 관객의 시각능력이다. 관객의 시각능력은 환영과 실재의 싸움에 관심이 없다.  어떤 때는 홀연히 양각처럼 보일 수도 있고 위치를 바꾸면 실재 같던 양각이 사라질 수 있다는 양쪽 모두를 그대로 다 받아들인다.  관객은 환영으로 보이건 음각으로 꺼지건 모두를 인식의 자양분으로 삼고 그 전환과정을 즐거워한다.  이용덕은 관객의 너그러운 수용성을 역상조각의 디딤돌로 사용한다. 자신이 작품을 어떻게 완성했다고 내세우기보다 자신이 유레카를 외쳤던 것처럼 관객들이 유레카를 외치며 작품을 완성해달라고 초대장을 보낸다.

 

 

 

필자 소개: 

케이트 림은 연세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 현재 아트플랫폼아시아 대표로 활동 중이다. 연극과 미술 전시를 결합한 “빛깔의 흥얼거림”(2024), “시감(視感)의 웅변”(2022)을 기획했으며, 국제미술포럼 “Fracturing Conceptual Art: The Asian Turn”(아시아의 反개념예술적 흐름, 2016)을 주최했다. 《박서보: 단색화에 담긴 삶과 예술》(2019), “단색화란 도대체 무엇인가?”(2014) 등을 저술했다. “Park Seo-Bo: Crafted Abstraction"(가제)은 2015년 출간될 예정이다. 

 

 

[1]Margaret Livingstone, Vision and Art (2002, Harry N. Abrams, Inc. New York), p.115, “The art historian John Shearman has written that Leonardo da Vinci was the first artist to use value consistently across colors, achieving tonal unity in which a figure presents a single, swelling, homogenously generated volume in contrast to the inevitably fragmented effects of colour-modelling.”

[2]케이트 림, “단색화란 도대체 무엇인가”(2024, “단색화 넘어, 너머로”, 리안갤러리)

[3]James Meyer, Minimalism: art and polemics in the sixties (2001, Yale University Press, New Haven and London), p. 142, 143, 미니멀 아트를 비판한 Richard Wollheim의 견해를인용함.

[4]Semir Zeki, Splendors and Miseries of the Brain (2009, Wiley-Blackwell), see “Part I Abstraction and the Brain” ; 케이트 림, “미술은 시각이 보내는 초대장”, 법률신문(미술의창, 2022년 6월23일)

[5]이용덕, “이용덕과 빌자나 시릭(Biljana Ciric)의 대담”, (2009년, 『이용덕』, 표갤러리), p.90,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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