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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집어본 실존(實存)의 화법(話法)

Kate Lim 

2009년 9월 6일

현상전(現像展)과 초기 이용덕

 

작가 이용덕의 철학과 미술 세계를 살펴보려면 한국 현대 미술이 현란하게 개화하기 직전으로 되돌아가 볼 필요가 있다. 그 당시의 사회적 역사적 환경이 작가의 미술 세계를 형성하는데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조망해 보는 것이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 정확한 시점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겠지만 필자는 모노크롬주의가 쇠퇴하면서 형상 미술이 부활하던 1980년대 중반이 한국현대미술의 전환점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용덕은 그 당시 현상전 (現像展, Present-Image)이라는 그룹 전시에 참여했다. 참가 작가들 중에 가장 나이 어린 축에 속했다. 현상전에는 대략 30여명의 작가들이 4-5년 동안 참여했다. 이들은 모두 자신들이, 그 당시의 주류였던 추상 미술에도 끼지 못하고, 그렇다고 현실 참여를 주장하는 민중 미술에도 끼지 않는 극소수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용덕은 최근 이렇게 회고한다.

 

“전시 직전에 카페에 가 보았더니 거기 모인 모든 작가들은, 당시 주류였던 추상회화와 추상조각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추상의 화단에서 빠져 나온 ‘이단아’들이었다. 이들은 재능이 있어서 나름대로 인정받고 있었지만, 한편으론 외로운 길을 걷고 있던 작가들이었다. 그러던 중 비슷한 성향의 작가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어 나와 비슷한 것을 추구하는 작가들이 나 말고도 또 있다는 것이 참 반가웠다. 그 당시 ‘현실과 발언’이 이끄는 민중미술은 젊은 작가 층에 큰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추상미술이 고집하는 교조화된 틀이 젊은 작가들의 다양한 창작력과 창의 욕구를 담아낼 힘을 이미 잃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젊은이들은 답답하게 느꼈고 뭔가 새로운 대안을 찾고 있었다. 민중 미술은 추상 미술과 달리 작가란 발도 땅에 안 디디고 고결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삶으로 내려와 그 보통의 현실에 참여하며 관련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적극적으로 정치, 사회적 이슈에 참여했다.”

 

이용덕은 젊은 작가로서 민중 미술이 추상 미술의 한계를 비판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공감할 수 있었다. 1980년대 한국 사회는 군부 정권의 철권과 이에 저항하는 민주화의 목소리 속에서 격동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최소한 대면은 해야 한다는 것이 당시 지식인들이 느끼는 사회적 소명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이용덕은 민중미술의 정서에만 공감했을 뿐 민중미술 진영에 합류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나는 민중 미술이 자신들의 정치적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 미술적 가치를 희생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들은 대중과 같이 해야 한다는 목표 때문에 미술의 기술을 버리고 좀 더 어눌하게, 마치 잘못 그린 듯이, 더 허접하게, 그렇지만, 정치적 사회적 내용을 담아서 미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이것은 미술의 퇴보라고 느꼈다. 그들의 정치적 소신에 내가 미술의 핵심이라고 느끼는 것을 갖다 맞출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회가 갈등으로 번민하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나는 단순한 껍질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보고 싶었다.”

 

이용덕이 민중미술진영에 합류하지 않았던 이유는 당시 한국 미술계가 찾고 있던 대안이 무엇이었나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이용덕과 현상전 작가들이 이후 발전시킨 구상미술은 추상미술과 민중미술이라는 두 대척 점의 중간에서 태어났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모더니즘의 엘리트적 성향을 의식적으로 경계하면서 민중미술의 거칠고 조악한 기법을 거부했다. 민중미술이 내포하고 있는 관성과 전통을 타파하려는 시대정서에 대해서는 공감하면서도 급진적 성향의 날카로운 모서리를 부드럽게 완화하고 이를 미적으로 보다 완벽하고 세련되게 구현해내려고 했다. 따라서 구상진영은 직선적이고 지시적인 민중미술과 달리 보다 철학적인 성향을 띠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제 3의 대안을 만들어내는 요소들이었고 아마도 현상전에 참여했던 작가들이 또렷하지는 않지만 무의식적으로 공유하고 있었던 미술관이었을 것이다. 

 

현상전 작가들은, 그로부터 몇 년 후 서양의 ‘포스트모더니즘’이 수입사상이라는 후광을 입고 한국 화단에 상륙하게 되기 전에, 한국 고유의 토양에서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대안적 시각을 가진 작가군 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열병이 바깥 세계에서 이미 강하게 불고 있다는 사실도 잘 몰랐다. 그렇지만 한국적 현실에 대한 불만과 좌절에 대해 독립적인 해결을 모색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의 길을 자신들도 모르게 걸었다. 한국의 토착 포스트모더니스트라고 할 수 있다. 한국현대미술은 그 이후 10여 년에 걸쳐 폭죽이 터진 것처럼 만개했다. 현상전에 참여했던 작가들 중 일부는 사라지기도 했고 일부는 학계에 물러났다. 또 일부는 현상전 당시의 화려한 데뷔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과거의 작가로 화석처럼 남기도 했다. 자신들의 감수성의 실타래를 포스트모더니즘의 환경 속에 이미 흠뻑 적신 젊은 세대들이 밀어 닥치면서 변화의 경계선에 위태롭게 서 있던 많은 기존작가들은 변방으로 밀려났다. 단지 몇 명만이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로서 현재까지 남아있을 뿐이다. 이용덕은 그 중 한 명이다.

 

현상전에 참여했을 당시 이용덕이 고민했던 것은 존재와 존재의 본질, 그리고 그 존재에게 찾아오는 한계상황에 관한 것이었다. 다분히 실존주의적 고민이었지만 이용덕은 ‘앙가쥬망’ 쪽으로 기울지 않았다. 그는 한계와 대항해서 한계를 깨려고 하기보다 한계로부터 거리를 둠으로써 한계를 존재의 내부로 포함시킬 수 있다는 동양적이며 전체론적인 생각을 했다. 이용덕의 마음을 떠돌던 또 하나의 관심은 모순의 충돌과 수용을 어떻게 해석하고 담아낼 것 인가였다. 이러한 존재와 모순에 관한 철학적인 고민 속에서 이용덕은 양각과 음각이 갖는 잠재적인 미술적 가능성을 타진해 보았다. 1991년 이용덕은 이런 시대의 유산을 마음에 담은 채, 그렇지만 이런 고민이 어떻게 자신만의 미술적 언어로 형상화될 것인지는 알지 못 한 채 베를린으로 떠난다.

 

kl. k.7d.24.10. 1920 Berlin 

 

이용덕의 작품 세계와 생각을 이해하고 탐색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되는 작품은 독일 체류 때에 만든 kl. k. 7d. 24.10. 1920 Berlin (1995)이다. 이 작품에 묻어 있는 그 특유의 감성과 언어가 역상(逆像) 조각의 심층 언어로 발전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독일 소년 33명의 두상이 석고로 작업된 테라코타이다. 베를린시립미술관 초대전 작품이다. 이용덕은 1994년에 우연히 오랜 옛날 사진을 벼룩시장에서 발견했다. 1차 세계 대전 직후인 1920년에 찍은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의 학급 사진이다. 사진 뒤에는 33명 소년들의 성이 적혀 있었다. 이 소년들의 조각상이 한 줄로 서 있는 모습을 보면 섬뜩한 느낌이 온다. 전시를 보도했던 Berliner Morgenpost 의 기자 Andrea Pupe 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목 끝까지 교복단추를 채운 33명의 소년들이 텅 빈 공간에 들어 와서 화석처럼 서 있다. 이렇게 세상으로 나오게 되면서, 이 작은 등장 인물들은 1920년을 떠나 현재로 시간 여행을 한 것이다”.

관객들은 33명의 소년들이 과거로부터 홀연히 나타나서 감성을 건드리는 것처럼 느낀다. 테라코타로 만들어진 똑같은 교복을 입은 것과 대조적으로 석고상으로 만든 아이들 얼굴에 나타난 표정은 제각각 다르다. 작가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심도 있게 각 소년들의 심정을 상상하면서 작업을 했는지가 강하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작가의 뛰어난 형상적 기교가 관객의 마음을 무리하게 침범하지도 않으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불확실한 근심의 안개가 부드럽게 퍼져 나온다. 관객을 사로잡는 것은 기가 막히게 재현된 소년들의 모습이 아니라 유령 같은 느낌을 주는 소년들의 존재감이다. 이용덕의 형상화를 통해 이 존재감이 관객들 인식의 영역 안으로 끊임없이 부딪치고 침식해 온다. 2005년 상하이 둘란뮤지엄 전시 때에 뮤지엄큐레이터였던 Biljana Ciric 과의 대담에서 이용덕은 이 작품에 대한 그의 경험을 소개했다. 

 

Ciric: 그 당시(독일 유학 당시)의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가 1920년에 찍은 사진을 보고 만든 것으로 알고 있다. 존재감에 대해서 언급한 것으로 아는데… 

 

이용덕: 나는 그 사진에 완전히 사로잡혀서 꼭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사진 속의 아이들이 너무 연약하고 우울해 보였다.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되어서 찍은 사진이었는데, 불안과 궁핍의 그림자가 아이들한테서 느껴졌다. 그 아이들이 곧 얼마 안 있어 또 다시 2차 세계 대전에 가혹하게 휘말려 들어갈 것을 상상 하면서, 전쟁 중에 그 아이들한테 무슨 일이 일어 났을까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전쟁 통에 죽었을 수도 있고, 살아남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들을 하나 하나 떠올리면서 작업을 했다. 그 아이들이 거쳐 나가야만 했을 모든 가능한 상황들이 내 맘을 떠나지 않고 괴롭혔다. 그 소년들의 이미지를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나의 작품은 고요 속에 닫혀져 있는 과거를 볼 수 있도록 창문을 열은 것과 같다. 그리고 현실에 입체로 만들어놓음으로써 시간 속에서 잊혀진 과거를 나의 입체에 보관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저장을 통해 현재의 시간과 공간을 과거가 차지하게 되었다.

 

사진이 갖는 두 가지 핵심적인 요소, 즉 이미지와 텍스트가 이용덕의 감성의 점막을 심각하게 교란한 것이 분명하다. 33명의 초등학교 아이들의 이미지가 그의 마음 속에 걷잡을 수 없는 힘으로 다가왔고 그는 이 이미지가 밀어붙이는 사회적, 역사적 의미와 이를 통해 다가오는 억누를 수 없는 개인적인 느낌과 충동의 성운(星雲)에 부응해야만 했다. 앞으로의 운명을 전혀 알지 못 하는 채 카메라 앞에 앉아 있는 33명의 소년들, 또 다른 전쟁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 살아 남을지 아니면 죽게 될지, 전쟁의 상처로 비참하게 손발이 잘려 암흑 속에서 삶을 마칠 수도 있는 아이들, 이런 존재에 얽혀 있고 함축되어 있는 기억과 의미들의 홍수를 그는 작품에 드러내고 싶었다. 그는 사진적 폐멸(廢滅)을 자신의 작품으로 옮겨서 소생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시간을 저지시켜 공간으로 담아 놓는다는 점에서 여전히 조각에 대한 고전적인 음감(音感)이 남아 있지만, 이 작품은 시간을 다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첫째, 사진이 찍혔던 당시의 뚜렷한 과거를 부활 시키며, 둘째, 소년들의 알 수 없는 불투명한 미래를 끌어 당겼고, 셋째, 이 모든 것을 느끼는 작가의 현재를 현현(現顯)한다. 이용덕의 사진에 대한 이러한 체험은 롤랑 바르트의 ‘풍툼(punctum)’을 연상시킨다. 사진 속 소년들의 이미지가 사진의 건조하고 얼어버린 표면을 뚫고 나와서, 사진 속에 함축되어 있는 과거의 시간을 소환하고 싶은 작가의 욕망을 자극한 것이다. 작가는 ‘풍툼’의 개념을 구체화하면서 작품의 화두(話頭)를 외부에서 내부로 옮긴다. 관객들이 느끼는 시각적 핵심이 예리한 조각적 묘사가 드러나는 외부가 아니라 그 내부, 즉 ‘뒤집어진 실존(實存)’으로 옮겨짐으로써 거론되지 않는 실제까지도 뭉뚱그려 포함시키는 좀 더 넓은 그물을 치는 효과를 내게 되는 것이다. 이 작품의 강렬함은 바깥쪽으로 향하는 노출 때문에 오는 것 같지 않다. 오히려 뭔가 그 이상을 추구하는 인간의 내면 지향성과 만나면서 작품의 실재감이 또렷해진다. 이용덕은 바르트의 ‘풍툼’을 입체로 전환시키면서 사진적 포착에서 생긴 감정의 분실을 조각 안으로 복구시켰다. 그의 입체는 시간의 망각지대로 흘러가 버리기 직전 마지막 한 방울 같은 순간의 창백한 흔적을 재현하고 있다. 여기에는 비애가 느껴진다. 작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엷어져 가는 존재를 복원하려고 했는데, 정작 걷어 올린 것은 잿빛 흔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용덕이 독일 소년들의 모습을 보면서 사진과 조각이라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장르를 개념적으로 통합해보려는 욕망을 무의식적으로 느꼈을 수도 있다. 전쟁의 경험이 휩쓸고 남긴 짓누르는 무게, 그리고 이 무게가 존재에 남긴 핏기 없는 흔적이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전쟁의 상흔이 강력한 물줄기처럼 뿜어 나오는 안젤름키퍼의 세계와 그 상흔이 알아 듣기 힘든 목소리로 중얼대는 듯이 밑에서 맴도는 평온한 늪의 세계가 만나는 교차점에 그의 눈길이 갔는지도 모른다. 독일 소년의 사진은 작가 이용덕에게 그 이후의 작품에 숙명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깊은 파동을 만들어냈다. 독일 소년 작품에는 결정을 유보한 채 생각에 젖어 있는 작가가 느껴진다. 작품 이면에 배회하는 작가의 애수는 새로운 형태로의 부활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용덕의 역상(逆像)조각: 전이(轉移)와 흔적 

 

이용덕의 이름이 국제 무대에 알려 지게 된 것은 역상조각 때문이었다. 이 형상들은 마치 어떤 행동을 하던 중간에 조각 안으로 잡혀 들어가서 혼자 외롭게 그 안에 분리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마치 이 분리된 억류가 이제는 편안해진 것처럼 타인의 세심한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듯하다. 미풍에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멋지게 엉켜서 걸어가는 소녀, 코트 주머니에 깊숙이 손을 찌르고 외투 자락에 몸을 감고 걸어가는 남자 등 그의 작품이 주는 이미지는 우리 주위에 편재(片在)하는 모습들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기억이나 개인적인 추억을 들여다 볼 때에 스쳐가는 일견(一見)같은 이미지들이다. 바로 이런 이미지의 친숙함 때문에 관객들은 즉각적으로 그의 작품에 이끌린다. 이러한 읽기 쉬운 명료함과 정감을 주는 단순함에는 저항할 수 없는 마력이 있다. 그러한 ‘쉬움’의 매력에 넘어가지 않기는 고도로 복잡한 암호 같은 이미지를 해독하는 것 만큼 어렵지 않을까. 이 역상 조각의 이미지들은 영화를 보고 난 후 마음 속에 서성거리는 영화의 장면이 정지되어있는 이미지와 같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이미지들에 대해서 말이 안 되는 역설적 코멘 트를 전혀 거리낌없이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아, 전에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이미지야”, “아니지, 저것은 내 마음 속에만 존재하든지, 아니면 영화에만 나오는 이미지야”, “그렇지만 저런 이미지가 존재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 이런 가면을 쓰지 않은 용감무쌍한 솔직함, 자신의 말을 연이어 부정하면서도 그 부정이 함축하는 진실에 자신도 어찌하지 못하는 그런 진솔함에 고마워하듯이 작가는 경이로운 테크닉의 작품을 선사해 준다. 이 작품의 형상들이 갖고 있는 이미지를 시각적으로 즐기려면 관객은 그 형상들로부터 안타까운 미련을 느끼는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그 안타까움을 못 이기고 작품에 가까이 다가가면, 이미지는 달 표면의 분화구처럼 공허하게 의미를 잃고 주저앉아 버린다. 의미가 증발하는 이유는 그 이미지가 그저 남아 있던 흔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용덕의 작품과 관객 사이에 어떤 ‘거리’를 유지하지 않으면 관객은 그 이미지를 회수할 수가 없다.이용덕의 이미지는 접근하면 파괴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음각의 공간 양식을 빌려서 존재하는 형상들은 어찌 보면 빛과 그림자 간의 플레이에 바탕을 둔 묘한 사진적 재현(再現)같이 보인다. 사진의 필름은 음각 캐스팅에, 현상된 사진은 양각으로 보이는 이미지에 대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음각 공간에 대한 이용덕의 관심은 실제로 수년에 걸친 철학적 사색의 연결 고리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이러한 사색으로부터 그가 얻은 존재에 대한 명찰이 바로 그의 음각 형상의 기법(奇法)속에 명재(明載)되어있다고 할 수 있다.

 

화이트리드와 이용덕: 음각의 양각화와 양각의 음각화

 

현재 외국의 화단에도 이용덕과 비슷하게 음각 캐스팅의 개념을 활용하여 작품을 만드는 작가들이 몇 명 있다. 대표적으로 레이첼 화이트리드(Rachel Whiteread)나 브루스 나우만(Bruce Nauman)등을 꼽을 수 있다. 이용덕이나 이들의 공통 분모는 ‘발상 뒤집어보기’ 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배후에는 눈에 뻔하게 보이는 것을 찾지 않고, 따뜻한 화롯가에서 편안하게 몸을 녹이고 있으려고 하지 않는 정신이 버티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용덕의 음각 개념은 다른 작가와 명확히 구별된다. 화이트리드에게 있어서 음각 공간은 양각 공간의 안 쪽 공간, 다시 말해 사람들의 육안과 인식이 발견하지 못했던 ‘잊혀진 공간’을 말한다. 반면 화이트리드는 이 공간에 형태를 부여한다. 만질 수 없고 느껴지지 못하던 무형의 공간을 만질 수 있는, 그럼으로써 느낄 수 있는 덩어리로 바꿔 놓는다. 그녀의 작품 중 ‘유령’(Ghost, 1990)은 영국의 전형적인 빅토리안 스타일의 주택의 내부를 석고로 캐스팅한 대규모 작품이다. 그 작품은 벽지에 묻어 있는 반점, 벽 페인트에 찍힌 얼룩 등, 오랜 세월에 걸쳐 그 집 안에 있어서 묻은 시간의 찌꺼기들, 흔적들을 보여준다. 작가는 이 모티브를 확대하여 ‘집’(House, 1993)이란 기념비적인 작품을 만들었다. 이 작품은 철거하도록 예정되어 있는 집 전체를 캐스팅한 작품인데, 보통 집의 ‘안 쪽에 있는’ 것들의 모든 특징이 바깥으로 나와 있다. 벽난로가 움푹 들어가지 않고 앞으로 튀어 나와 있다. 문 손잡이는 텅 빈 동그란 구덩이처럼 안 쪽으로 들어가 있다. 화이트리드의 작품은 인식되지 못한 공간에 존재를 만들어 줌으로써 여기에 묻혀 있던 의미와 생각을 소생시키는 것이다. 느껴지지 못하고 간과되던 곳을 들어 올려 캐스팅된 입체를 창조함으로써 거의 건축적인 가치로 변형한다. 이에 따라 화이트리드의 음각은 ‘또 다른 양각’이 된다. 음각 공간을 캐스팅해서 또 다른 독자적인 별도의 실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 화이트리드 작품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일 것이다. 반면 이용덕의 역상은 보이는 부분을 음각으로 집어넣은 것이다. 즉 양각으로 보이던 것들을 음각으로 변환시키면서 그 뒤집혀진 실체를 거리를 두고 보며 생각하게끔 한다. 화이트리드가 음각을 양각화했다면 이용덕은 양각을 음각화한 것 이다. 바로 이 점이 이용덕과 화이트리드의 근본적인 차이다. 양각의 실체를 띤 화이트리드의 작품은 ‘명사(名詞)’이다. 반면 이용덕의 음각은 ‘형용사’ 쪽에 더 가깝다. 마르셀 듀쌍(Marcel Duchamp)은 ‘인프라씬’(infra-thin)이라는 개념을 설명하면서, 이것은 절대로 자기 혼자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명사가 아니라 항상 형용사라고 했다. ‘인프라-씬’은 안 쪽도 아니고 바깥 쪽도 아닌 중간쯤에 걸쳐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예를 들어 담배를 필 때에 담배 연기와 담배 연기를 뿜어내는 입의 접촉면 같은 걸 가리킨다. 실제로는 거의 느낄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둘 사이의 간극, 또는 한 상태로부터 다른 상태로 이전해 갈 때 생기는 구별이나 그 이전과정을 가리킨다. 듀쌍의 이 개념은 이용덕의 음각 개념과 유사한 데가 있다. 왜냐하면 그의 음각 캐스팅은 꼭 오리지날은 아니면서 그 오리지날이 남긴 ‘자국’을 보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음각의 흔적에는 전이(轉移)의 개념이 함축되어 있고 오리지날과 흔적 사이에서 생긴 변화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일별(一瞥)하는 ‘Is’의 왕국과 적당한 거리

 

형용사적 성격 때문에 이용덕 역상 조각은 핵심은 인간 내면에 성스럽게 존재하는 ‘의심’과 ‘긍정’의 패러다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의심과 긍정을 오가게 하는 것이 ‘거리(distance)’이다. 어느 거리에서 보는가에 따라 이용덕이 보여주는 흔적은 달라진다. 화이트리드의 작품이 명사적 성격 때문에 의심할 여지가 없고 거리와 관계없이 일정한 것과 대조된다.

 

이용덕의 작품은 상이한 존재적 질서가 얽혀있는 평온한 수면을 휘젓는다. 잔잔한 수면 거의 가까이까지 미끄러져 내려오는 새 한 마리가 살짝 고요한 물의 평정을 건드리면서, 다시 하늘로 솟구쳐 오르기 전에, 갑자기 한 순간, 물 속에 잠겨 있는 ‘Is’ 왕국을 슬쩍 지나치며 보는 것이라고 할까. ‘Is’ 왕국의 모습을 일별(一瞥)하는 새처럼, 그의 작품에서 우리가 이런 순간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거리’이다. 음각 형상과 어떤 적정 거리를 유지하면, 그 음각은 윤곽과 부피로 부활한다. 작품과 관객과의 이 물리적 거리는 이상한 속성이 하나 있다. 이 ‘거리’를 반항적으로 깨고 다가가서 무엇인지를 느끼고 싶게 만드는 욕구를 불러 일으킨다. 관객은 알고 싶기 때문에 ‘거리감’을 깨뜨리게 된다. 그리고 나서 우리의 눈 앞에 벌어지는 것은 거의 아무런 질서나 규칙이 없는 미친 성찬과 같다. 결국 이 거리는 단순한 거리가 아니라 ‘심미적 거리’이다. 이 거리를 깨뜨리면 좀 전에 보았다고 믿었던 대상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오로지 음각껍데기에 남아 있는 불편한 부정만이 있게 된다. 관객들은 ‘인프라씬’의 경계를 오간다. 실체가 형성됐다가 바로 다음 그 실체를 부정하는 분해(分解)가 일어나는 순간이다. 이용덕의 작품은 바로 이러한 교차점 위에서 배회하며, 고정된 한 순간을 찬미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순간 사이에 이미지가 왔다 갔다 ‘박동’하면서 음악적인 비트를 일으킨다. 마치 미니멀리스트 비트와 유사하다. 순간 숨가쁘게 지나치는 이미지가 바삭바삭한 선명함으로 투사되었다가 정신차려보면 뭔지 모르는 물체로 분해되는 것이다.

 

이런 음각 캐스팅 방식은 이용덕의 인식론적 탐구에 얽힌 여러 갈래의 생각들이 하나로 모여져 만들어진 집결체이다. 그는 일찍부터 음양에 관심을 가졌다. 양각과 음각의 단순한 공식은 서로 부정하면서도 서로를 보충하는 묘한 관계이다. 이용덕은 젊은 시절에 이 모순의 이슈를 어떻게 작품 속에서 풀을 것인가를 고민했고 이 두 가지를 수렴시킴으로써 조화로운 이미지를 제시할 수 있다는 생각에 몰두했었다. 실제로 이용덕은 음각과 양각을 동시에 사용한 작품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이용덕은 독일 유학 시절에 예술적 ‘유레카(Eureka)’를 경험한다. 그 동안 그는 ‘의식적 눈초리’하에 인공적으로 고안된 대칭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칸트적 유풍을 서투르게 실험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미처 깨닫고 있지 못했던, 그렇지만 너무나 자명한 이치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것은 음각으로 해놓아도 양각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이었다. 작가가 구태여 양각을 내놓을 필요가 없다. 부정을 하더라도 긍정이 된다. 과거의 인공적 관념으로부터 완전히 결별하면서 이용덕은 음각 캐스팅에 관해 근본적으로 다른 견해를 갖게 됐다. 예전과 하나도 변하지 않고 여전히 똑같이 양각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껍질로서의 공간이었지만, 그 음각 공간은 이용덕이 완전히 다른 작곡을 할 수 있는 악보로 승화했다. 그가 만든 곡조 속에는 과거의 흔적이 낭랑하게 울린다. 유령의 흔적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그 이면에 존재에 대한 긍정과 확신을 전달하고 있다. 오리지널의 물리적 속성이 남겨 놓은 음각의 흔적에서 우리는 똑같은 긍정을 본다. 이용덕은 좀 더 본격적으로 ‘존재’라는 라이트모티프(leitmotif, 主樂想)를 자신의 작품에 들여왔다. 그가 소개하는 존재는 내부 균열로 휘청거리고 동요한다. 일단 곡을 완성한 이용덕은 가사를 찾았다. 그가 눈길을 둔 가사는 바로 사람들의 이미지였다

 

균열(rupture)로부터 치유(healing)로 – ‘저장된 이미지(stored image)’

 

이용덕은 열정적으로 사진을 찍는다. 많은 사람들의 이미지를 카메라로 찍어 놓았다가, 자신만이 아는 특유한 조율을 거쳐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로 최종 저장한다. 그의 음각 형상들이 실려 있는 도록을 넘기다 보면, 자신이 보관한 필름 롤을 길게 늘이면서 각각의 이미지들에 생명을 불어 넣는 프로메테우스의 모습이 떠올려진다. 마치 카메라 버튼을 찍었을 순간의 바로 직전과 직후에 묻어 있는 세상의 법석을 솔로 잘 털어내고, 자신만의 변덕스러운 상상력으로 그 이미지에 살아 있는 리얼리티를 문질러서 벗겨내고, 마지막으로 초연한 관조의 광택을 바르면 드디어 이용덕의 사람 동물원이 나온다. 이 사람들의 존재는 모두 정지되어 매달려 있다. 그의 음각 형상들은 기가 막힐 정도로 정교하고 세련되다. 양각과 음각이 정밀하게 평형 상태를 이루어 보여지는 형상의 이미지로부터 뿜어 나오는 세련된 매력을 관객은 쉽게 떨쳐 버릴 수 없다. 이용덕은 자신이 어떻게 이미지를 ‘저장’하는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는 사람들을 보면서 대상을 선택할 때, 대상 고유의 아이덴터티(정체성, indentity)보다 순전히 그 순간의 아이덴터티에 주목한다. 내가 그 대상을 마주치면서 스쳐 지나가는 순간의 아이덴터티이다… 이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버리는 것’과 ‘선택하는 것’이 생긴다. 우리가 마주치는 사람들 중에서, 그 사람들의 자아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그런 타인이 몇 명이나 되는가? 앉아 있는 사람, 걸어 가는 사람, 빨간 옷을 입은 사람같이, 타인의 정체성은 어느 특정 순간, 특정 장소에서 순간적으로 목격되어질 뿐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그것만으로 충분하고, 나는 그렇게 마주친 타인의 모습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게 보인다… 그것은 마치 시가 단어를 버려내야 하는 고통 속에서 선택된 단어를 통해 빛을 발하는 것과 같다… 나도 그런 의식적인 전이(傳移, transference)나 절단(切斷, severance) 작업에 동참하고 싶다.”

 

이용덕이 깊숙이 들어가고 있는 개념은 시간과 장소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길고 무거운 세부 사항을 잘라버린 ‘순간적’ 혹은 ‘단편적’ 정체성이다. 그런데 이렇게 절단된 불완전한 정체성임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인 속성이 내재한다. 다른 어떤 실체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절단’된 부분에 횃불을 비추면 유령 같은 모습을 보게 된다. 자신의 실체로부터 잔혹하게 연결선이 끊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용덕은 여기서 이 단편적인 존재에 어떤 초월적인 요소가 있고, 바로 이것이 분리할 수 없는 순간에 포착되는 시각적 핵심을 이룬다고 설명한다. 관객은 이 순간 갑작스런 180도 전환에 부딪히고 어지러움을 느낀다. 단편의 병적인 요소가 어떻게 갑자기 그와는 정반대인 초월적인 것으로 바뀔 수 있을까? 이용덕의 이 숨가쁜 인식의 도약에 불가사의한 힘이 도사린다. 대상을 움직였다가 정지시키는 힘, 잘랐다가 그 균열을 다시 치료해 주는 힘이다. 이 점이 바로 이용덕의 음각 형상의 개념의 골자이고 균열을 가지고 있는 존재에 관한 작가의 예술적 고백이라고 필자는 믿는다.

 

절단에서 온 상처는 ‘거리(distance)’를 통해 치유된다. 가까이에서는 심연으로 빠질 듯한 절단이지만,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보면 이음새가 거의 느껴지지 않을 만큼 완벽하다. 더구나 뜻하지 않게 이용덕의 치유를 도와주는 지원 부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관객의 욕망이다. 상처가 아물기를 바라는 욕망은 ‘미적 (美的)거리’ 와의 결합을 통해서 이음매가 없이 잘 복구된 이미지, 즉 실제로 있을 법하면서 오리지널 같은 양각이미지를 후원해 준다. 작품 Diving 0609(2006)은 다이빙하고 있는 물리적으로 끊을 수 없는 순간의 연속 중에서 한 순간을 집게로 집어 내듯이 묘사한 작품이다. 다이버가 아찔한 현기증을 이겨내고, 몸을 휘감는 공기와 중력감을 만끽하면서 날아 내려 오는 그 순간은 다이버의 순간이자 관객이 그것을 상상하고 싶어하는 순간이다. Reading 0615(2006)에도 역시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는 누군가를 불러오는 ‘대리 만족’이 있다. 책의 내용이 지적 도전을 요구하든, 감정의 회오리 속으로 내몰고 있던, 추상적 성찰에 관한 것이건, 작품 속에 파묻혀 있는 소녀의 모습에는 평온한 총명함이 뿜어난다. 얼마나 부러운 순간인가. 

 

이미지가 실존(實存)이다

 

이용덕은 ‘저장된 이미지(stored image)’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좀 더 구체적으로 밝힌다.

“사람들은 자기의 진짜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거울에 비춰진 모습을 알고 있을 뿐이다. 원래의 진짜 이미지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이 거울에 비춰진 이미지를 마음 속에 떠올리는 것 자체가 대단히 중요하다. 따라서 그 ‘허상’은 ‘실상’을 수용하는데 중요한 근거로 작용한다. 나의 작업에서 ‘전이(transference)’의 목적은 – 물론 모든 형태의 재현이 다 비슷하겠지만 – 존재하는 이미지를 복제하거나 재현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 이미지들은 ‘오리지날’과 ‘복제품’이라는 인과 관계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 나는 여러 단계를 거쳐 작업을 해서 마지막 단계의 이미지를 저장한다. 이 마지막 단계에서의 특정 이미지, 즉 ‘허구적’ 이미지는 앞의 단계들을 제거하거라 자체적으로 존립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이미지는 몇 단계를 거쳐서 ‘허상’, 즉 ‘허구적 이미지’로 최종 재현되는데, 이것은 오리지널과는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존립하면서, 아무리 허구적이라도 오리지날이 차지할 자리를 밀어내고 누가 진짜인지를 가리는 게임에서 주심이 된다. 허상이 ‘실상’ 혹은 ‘실존’을 지시하는 권위를 갖게 되는 것이다. 놀랍게도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희곡 No Exit 에서 이용덕과 비슷한 얘기를 한다. 세명의 주인공이지 옥에 간다. 사르트르는 지옥을 거울이 없는 곳으로 정의했다. 거울은 자신에 관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자아에 관한 지식을 제공하는 원천이 된다. 그런데 이 지옥에서는 나를 알기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다.. 결국 한 주인공 이네즈(Inez)는 나머지 두 명에게 소리를 지른다. “너희 둘이 나의 얼굴을 훔쳐 갔다!” 타인이 ‘나다움’에 대해서 맘대로 조작할 수 있고 휘두룰수 있는 곳, 즉 다른 사람의 ‘주관성’의 횡포 아래 나의 자아가 놓이게 되는 곳이 바로 사르트르가 말하고자 했던 지옥이다

 

사르트르의 희곡에서 겉으로 보기에는 보통 호텔처럼 보여지던 곳을 지옥으로 변하게 한 주범은 거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이미지의 부재(不在)이다. 이 부재한 이미지가 바로 작가 이용덕이 말하는 ‘허상’이다. 그 이미지는 남에 의해서 규정되는 종속성을 초월하여 그 자체를 본질로 선언하는 당당함이 있는 이미지이다. 사르트르의 희곡을 읽는 독자들은 진짜라는 것이 외부 인식에 의해 내용과 반경이 결정될 수 있다는 황당한 사실의 깊이를 음미할 것이다. 이용덕의 작품을 접하는 이들은 이러한 ‘허상’의 이미지가 갖는 마술 같은 신비함에 발걸음이 비틀거린다.

 

이미지는 영혼이다

 

이 신비함은 체코의 소설가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에게 영혼의 문제로 다가선다. 그는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에서 이용덕과 사르트르가 탐색했던 이미지의 문을 두드린다. 여주인공 테레자(Tereza)는 자신의 몸을 통해 자아(自我)를 보려고 거울 앞에 선다. 

 

“그녀가 거울에 끌린 것은 허영심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놀랍게도 자신의 ‘나’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보는 것은 신체라는 기계를 비추는 계기판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기 얼굴의 생김새를 통해서 자신의 빛나는 영혼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거울 속의 이미지를 더욱 뚫어지게 쳐다 보면서 나머지는 없어져버리고 오로지 그녀 자신인 것만 남기를 바랬다… 영혼이 몸의 표면 위로 떠오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쿤데라는 이용덕의 ‘허상’에 ‘영혼’이라는 세례명을 주었다. 몸 속에 침잠해 있다가 거울의 표면에 떠오른 것, 이것이 바로 테레사가 느낀 진정한 ‘나’이다. 거울을 통해서 보는 자신에 대한 이미지는 육체적 유사함을 넘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진정한 나’에 대한 느낌이다. 이용덕의 작품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안개 낀 통로 너머 어떤 교차점에 도달하게 만든다. 그 곳은 단순히 오리지널과 복제된 허상이 접합하는 지점이 아니다. 그 곳은 허구적 단편과 그 역설적 의미가 ‘나’와 마주치는 곳이다. 거기서의 ‘나’는 허구적 실체를 통해서 진리에 도달하는 또 다른 길이 있음을 인지하는 ‘나’이다.

 

‘오리지널’과 ‘허구’의 이슈는 예술사에서 불후의 옥좌(玉座)를 차지하는, 인간 존재의 뇌리를 영원히 떠나지 못하는 고전적 이슈이다. 이용덕의 ‘저장된 이미지’는 이 고전적 이슈에 직접 부딪친다. 그것은 단순한 허구가 아니다. 오히려 ‘오리지널’이나 중간가공단계의 이미지들을 정제시키면서 뽑아낸 순도 높은 영혼이다. 이용덕은 마치 테레자처럼 육체적 실체를 ‘부인’하는 과정을 통해 그 너머에 있다고 믿는 초월적 영혼을 불러낸다.

 

이용덕의 진화(進化): 다양성과 실험

 

이용덕의 역상 조각이 국제 무대에서 뜨거운 시선을 받기 시작한 것은 2003년쯤이다. 그 전후에 이용덕은 음각 캐스팅을 통해 사람들의 이미지를 순수하게 그려내는 작업에 몰두했었다. 그러다 2006년경부터 스토리적인 요소를 작품에 첨가하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어 Philip, New York(2008)은 공간 감각을 촉발하는 미니멀리스틱한 선을 배경에 그려 넣어서 극적인 효과를 자아냈다. 작품 속의 형상은 마치 연극 무대 위로 이동된 ‘시각적 독백 (visual soliloquy)’과 같은 느낌을 준다. 어떤 심리의 미로에 한적하게 기대어 서 있는 한 남자는 아마도 마음 속에는 아직 다 타버리지 않은 기대감이 반쯤 억누른 욕망 속에 서성거리고 있는 듯하다. 마치 이용덕이 연출을 하고, 배우는 약간 주춤대면서도 우수가 깃든 애정으로 연기에 임하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작가가 아무리 배경을 최소화하고 걸러낸 이미지의 ‘순수함’과 단절된 ‘고독’을 지키려고 애썼어도, 포착된 순간의 ‘이전’과 ‘이후’의 스토리가 매혹적으로 새어 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작품의 배경을 단순하게 만들었기 때문인 것 같다. 이것이 폭발적 힘을 발휘해서 이미지를 대하는 관객의 욕망을 자극하기 때문인 것 같다. 관객은 ‘이전’과 ‘이후’, 그리고 그 이상을 불러내고 싶어진다. 작가가 제공 한 약간의 힌트는 ‘영매(靈媒)’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더 자세히 보고 싶어서 가까이 다가가면 곧바로 추격해오는 이미지의 분해 때문에 더 심하게 손실을 느낀다. 단지 하나의 이미지가 증발한 것이 아니라 만발(滿發)해있는 환상의 그물망을 음각의 공간이 무자비하게 한 순간에 빨아 들인 것 같이 느낀다.

 

이용덕의 근래 작품 중에는 비엔날레 출품작들이 있다. 상하이 비엔날레의 Aphasia in front of the car(2006), 스페인 비엔날레의 I’m still here(2008), 싱가폴 비엔날레의 I’m not expensive(2008), 이 세 작품은 서사시적인 스케일이다. 겉으로 보기에 관련이 없는 이미지와 장면을 자의적으로 합쳐 놓은 것 같다. 작품이 불러일으키는 의미는 하나의 고정된 생각으로 확정해서 파악하기 힘들다. 그렇지만 조심스러운 눈으로 보면 장면들 사이에 미묘한 조화의 뉘앙스도 느껴지고, 마치 힌트가 있는 수수께끼를 푸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는다. 작가가 영화감독이 되어서 등장 인물들과, 여러 빛깔의 조명, 무대 장치와 개개 화면 등을 ‘미젱쌍(mise-en-scéne)’의 개념으로 결합하여 하나의 큰 화면을 창출한 느낌이 강하게 온다. 아마도 이용덕은 불연속적인 개별 화면들에서 꼬여진 연속성을 찾아 보라고 도전하는 것은 아닐까. 삶은 일관되고 균일한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예측 불가능한 딜레마로 가득 차 있다. 수 많은 지엽적인 것들이 우리를 오도(誤導)할 수 있다. 사실 우리는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실재와 그 시간 구조를 잠시 보류해야 할 때가 있다. 특정 관점에서 사물을 조망할 때 조차도 간혹 변덕스러운 운율을 취해야 할 때가 있다. 이용덕의 음각형상에 함축되어 있는 의미를 더 복잡하게 짜서 더 큰 드라마로 테마화한 것이 비엔날레 작품들이다.

 

새 작품들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작품들은 새로운 영역에 도전한다. 이용덕은 마치 모험을 하듯이 좀 더 높은 고지로 옮아가서 음각의 흔적이 가질 수 있는 더 심각하고 그래서 우울할 수도 있는 잠재력을 실험해 보려는 것 같다. Overshadowed 와 Outshined 두 작품에는 이런 잠재 징후가 상대적으로 약하게 드러나지만 여전히 슬픈 색조를 지울 수가 없다. 아이를 업고 있는 여자와 마른 과일 같은 할머니, 두 여자의 이미지 뒤에는 컴컴한 그림자가 거인처럼 드리워져 있다. 그림자의 위력이 두 여자의 실체를 너무 애처로울 정도로 왜소하게 만들어서, 음각 공간에 남겨진 그들의 흔적마저 그림자가 삼켜버린 듯하다. 흔적이 불러 오는 반향은 거의 애달픈 무실재(無實在)에 가깝다. 여자의 흔적과 거대한 그림자로 표현된 타인의 흔적이 병렬적으로 대비되면서, 관객은 이 여자의 슬픈 존재의 왜소함을 느낀다. 두 여자들은 황폐해질 정도로 오랜 동안 어딘가에 묶여져 있었기에, 심지어 자신들의 존재 안으로 족쇄가 채워진 채로 갇혀 있는 것 같다.

 

어린이들은 이용덕의 작품 중에 종종 등장하는 친숙한 소재이다. 이번 전시에도 약간 반항기가 있는 소녀의 이미지를 그린 작품, Opening the Darkness 와 Taking a Risk 가 소개된다. 어딘가에 들어 가려고 문 간에 발을 디디는 소녀의 자태 어딘가에 어른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뜻대로 해 보겠다는 약간의 반항기가 느껴진다. 샐쭉한 얼굴 표정에서는 아이 특유의 장난스런 고집도 읽힌다. 이용덕이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작품에서 풀어나가는 어린이들의 이미지는 그의 작품에 우화적(寓話的)인 느낌을 더해준다. 특별히 나쁜 맘을 먹지는 않았어도 어른의 규칙을 그대로 이행하지는 않으려는 아이들 나름대로의 건강한 반항이 이야기를 이끄는 견인차이다. 아무런 의심 없이 불확실한 미지의 세계로 우연히 발길을 들여 놓은 아이, 방황 하는 아이에게 뜻밖에 찾아 오는 행운의 발견 등이 보인다. 이용덕은 이 소녀의 이미지 안에 승낙을 담아주면서 이렇게 말한다. “주저하지 말아라. 가서 너만의 신기한 나라를 찾아 보렴”.

 

그렇지만 우리의 방황이 항상 기분 좋고 쾌적한 산책이 되는 것만은 아니다. 때론 이제까지 지켜오던 규범 체계가 난폭하게 무너진 세계로 털썩 떨어질 수도 있다. 현기증과 싸우면서 정신을 차려 보면 그곳은 내가 있던 사회가 뒤집어져 있는 곳이다. 나는 뒤집어진 입구를 통해서만 그 사회에 들어갈 수 있다. 예전에 느꼈던 것을 다시는 느끼지 못하는 세계로 온 것이다. 그 이유는 나의 뒤집어진 존재가 예전에 갖고 있었던 보호막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보호막이 없는 연약한 살은 주어진 구조의 거친 손톱에 계속 긁히고 상처를 입을지 모른다. 작품 First Kiss In Pink 는 나를 판단하는 ‘타인의 시선’과 나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따갑게 맴도는 울타리의 경계를 넘는 애수 어린 순간을 느끼게 한다. 이 작품을 통해서 우리는 ‘음각 공간의 존재’에 대해서 작가가 탐색해 온 개념의 심층부를 들여다 볼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비록 눈에 보이지 않는 지하의 영역이지만, 지하를 뚫고 나와 또 다른 진실을 내보일 수 있는 힘이 도사리는 곳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용덕은 리얼리티가 ‘허상적 실체’라는 제 2의 인생을 갖게 되는 과정과 영역에 관해 고민하는 작가이다. 관객은 그의 작품을 통해서 오리지널이 통과하는 ‘문간’으로 초대되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게 된다. 그런데 작가는 이뿐만 아니라, 관객에게 이 문간을 지나서 통로 너머에 존재하는 다른 세계로 건너가 보라고 손짓을 하고 있다. 항복하듯이 두 손을 들고 있는 나체 남자의 작품에는 또 다른 강렬한 순간이 담겨져 있다. 항복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사이에서 미친 듯이 마음이 흔들릴 때, 운명적 결정이 미친 망설임을 밀고 들어 와 버린 순간이다. 이 기울어지는 순간에 존재 양식이 바뀐다. 이용덕은 이러한 복잡한 역설을 보여 주려고 자신의 음각 개념을 좀 더 심화시킨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서 이분법에 충실했던 존재가 양 극단을 불안정하게 왔다 갔다 하는 상태로 떨어지는 순간, 다시 말해 존재의 ‘떨림’을 목격하는 순간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존재의 ‘떨림’은 셀 수 없이 많은 진주빛 구슬로 만들어진 작품 Oscillating Bride 에서 구체화되고 있다. 작가는 마치 호머가 했듯이, 긴 이야기의 한 중간에서(in medias res)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시작하는 듯 하다. “그런데 갑자기 뜻하지 않은 순간, 신부는 의심의 베일 속에서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은회색 응결의 광택 밑에서 구슬은 거의 느낄 수 없는 진동을 한다. 이 구슬들은 웅장한 우연과 필연을 엮어나가는 우주의 입자와 같다. 이 입자들의 조직화되지 않은 결합으로 인해 우리는 삶에 대한 인식 속에서 전율을 느낀다. 구슬들은 미결정이 일으키는 에너지를 영원히 사모하면서 의미를 한 가지로 고정시키는 것을 회피한다. 이용덕의 음각 흔적은 이 작품에서 극적인 변형을 거친다. 이것은 마치 딱딱한 고체의 표면 위로 작가의 인식의 섬광이 투과되면서, 죽어있는 표면 대신에 그 자리에 춤추듯이 진동하는 수 만개의 입자가 투명하게 나타난 것과 같다. 그 진동은 바로 존재의 균열에서 나오는 떨림이다.

 

마지막 생각 – 유예(猶豫)의 긴장

 

빛 바랜 과거를 밀쳐내며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때면, 변화에 파묻혀 방향 감각을 잃은 사람들이 대안적 사고방식을 동경하게 된다. 혼돈으로부터 벗어나는 하나의 방법은 여러 다른 이야기들을 결합하여 새로움을 창조하는 것이다. 혼합(hybrid)이나 모방(pastiche)을 위해서 선택된 요소들은 놀랄 정도로 다양할 수 있다. 그 무한한 조합에 일일이 색인 카드를 붙여 인상적인 규모의 도서관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반면 이와는 다른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열망은 터무니없이 광대한 백과 사전적 지식을 시적(詩的) 정신으로 끌어 안으려는 것과 비슷하다. 교본을 좇지 않으려는 특징 때문에 이들은 한걸음 물러서서 상황을 관찰하는 지성(知性)이 된다. 또한 이들은 판단의 기준을 제공해서 사람들이 설명할 수 없는 상황들을 풀어 나가도록 도와 주는 역할을 한다.

 

필자는 이용덕의 예술이 진리에 도달하는 두 번째 스타일에 매우 유사하다고 믿는다. 그의 주제는 독자적인 진실들이 서로 얽히고 교차하는 지점에서의 준거틀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의 역상 조각은 존재자체가 갖고 있는 역설을 느껴지는 대로 추상화하면서 역설이 만나는 간극(間隙)에서 벌어지는 일을 포착하려고 한다. 이용덕의 작품은 이 간극에 있기 때문에 이상한 긴장을 자아낸다. 그의 ‘저장된’ 이미지는 균열을 갖고 있으며 이 균열은 모든 존재 안에 있는 실존적인 상흔(傷痕)이다. 그래서 이용덕은 이 존재들을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되어가는’ 것으로 설명한다. 이 ‘되어가는’ 이야기는 삶에서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풍부하게 끌어 안아야 한다. 부정과 긍정의 순간에 일어나는 그의 이야기는 삶에 대한 신랄한 선고를 잠시 멈추고, 다른 것들을 좀 더 포옹하려고 애쓰면서 우리에게 유예(猶豫)의 긴장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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