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순간을 떼어내는 조각, 그 오리지널 카피

권혁규, 전시기획자

 

시간은 순 거짓말이다. 오늘 시간은 수많은 차단막을 내리면서, 과거 혹은 미래를 향한 열망을 ‘지금 이곳’으로 수렴시킨다. 그렇게 거의 모든 것을 현재화 해버린다. 모든 것이 데이터로 전환되는 환경 안에서, 인간의 감정과 인식, 발 딛고 있는 물리적 토대는 분쇄되고 해체되어 데이터 팩(pack) 안으로 수거된다. 이제 시간과 경험을 대리하는 건 쉬지 않고 업로드 되는 이미지들과 그것들로 이뤄진 네트워크뿐이다. 

 

이러한 오늘, 시간을 ‘감각하기’란 그리 쉽지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 시간은 스스로를 망각하고, 그에 대한 감각 역시 잊혀진다. 생각에 잠길 여유나, 저항을 상상할 힘은 어디에서도 허락되지 않는 듯하다. ‘오늘’은 어떤 시나리오나 스크립트 없이 촬영을 시작한 영화처럼, 끊임없이 현재화되는 씬과 씬의 전환 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듯 다가온다. 오늘 도시를 역사와 맥락이 소거된 일종의 정크 스페이스로 묘사하고, 그 안에서 대중 행위의 최종 양식은쇼핑뿐(“the terminal form of public activity”)이라고 주장한 렘 콜하스의 논의처럼[1] 오늘 시간이 역사를 멈추고, 모든 것을 자본의 단위로 환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질문하게 된다. 현명한 소비자/쇼퍼가 되기만 바라는 대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음새조차 보이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로 운영되는 시간 안에서 우리는 무언가를 추출할 수 있을까? 

 

누군가는 이 같은 현재에 균열을 내면서 그것과 결별하는 순간을 상상할지도 모른다. 대문자 역사를 되려 그리워하며, 만질 수 있는 시간, 관계를 형성하는 복수의 시간들을 그려볼 수도 있다. 진정한 동시대성이란 아이러니하게도 앞서 언급한 시간의 현재주의적 거짓말에 완벽하게 순응하지도 대립하지도 않으며, ‘시차와 시대착오를 통해 시대에 들러붙음으로써 시대와 맺는 관계’, 현재에 ‘너무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관계’들을 세우는 데서 출발하는지도 모른다.[2]

 

이러한 동시대성의 욕망과 모순을 이용덕의 ‘역상조각(易像彫刻: inverted sculpture)’에 겹쳐본다. 이용덕이 창안한 역상조각이란, 일반적으로는 부조(浮彫)에 해당할 조각적 형상을 역전시켜(inverted) 놓은 것처럼, 움푹 들어간 형태의 조각을 가리킨다. 익숙한 인물과 평범한 배경, 또는 상황을 묘사하는 듯한 작업은, 그러나 어느 순간 오목해진다. 조각은, 시점의 이동과 거리에 따라 볼록함과 오목함이, 안과 밖이 역전되는 인지적 상황을 만들어낸다. 시점의 이동에 따라 형태가 다르게 인지되곤 하며, 마치 조각 자체가 움직이는 듯한 착시가 일어나기도 한다. 이러한 역전과 사라짐의 환영은 단순한 효과로서의 착시를 넘어, 시간을 사유하도록 만드는 조각/물질의 태도를 보여준다. 

 

본 논고는 이용덕의 조각을 시간을 ‘감각하는’ 시도로 읽어본다. 이는 이용덕이 음각과 양각을 탐구하며 이어간 그간의 조형 실험이 시간적 ‘관계’를 물질적으로 형상화하는 시도가 아니었는지 질문하는 것이다. 그렇게 오늘에 이른 역상조각이 이질적인 시간성과 시차의 장면들을 어떻게 전달하는지,어딘가로 휘발되는 찰나를 포획하며, 현재를 또 다른 현재로 교체하는 대신 과거와 미래를 물질이자 관계로서 존재하지 않는지 확인해본다.

  

 

  1. 순간을 채취하는 물질: 사진 또는 조각

 

이용덕 개인전 《순간의 지속 THE MOMENT NOT A MOMENT》(2024)은 시간의 거짓말, 시차와의 관계로 성립되는 동시대의 모순과 농담을 경유한다. 순간(the moment)을 말하는 제목은 동시에 그 역전과 충돌(not a moment)을 지시하며, 탈각되고 지연 · 지속되는 시간을 말한다. 그렇다면 포착된 순간은 어떻게 물질로서 지속되는가? 무한한 현재 대신 회복될 복수의 시간성은 어떻게 빚어지는가?

 

과정을 살펴보면, 먼저 순간의 “채취”를 말해 볼 수 있다[3]. 실시간으로 업로드 되는 이미지, 텍스트 정보들은 눈 깜짝할 새에 새로운 현재를 운반한다. 지나간 시간을 그대로 응시하기는 곧바로 중지되고, 도래할 시간을 상상하거나 기다리는 일도 차단된다. 이때, 이용덕은 시간의 차단막에 구멍을뚫듯 순간에 개입한다. 작가는 본격적인 조각 제작 전, 주변을 관찰하며 본인의 시선이 머무는 상황과 대상을 사진 찍는다. 경우에 따라, 영화나 잡지,온라인에서 사진 이미지를 선별하기도 한다. 여기서 사진 이미지는 일종의 유사 현재, 반(半)현재, 비(非)현재로서 특정 ‘순간’에 위치한다. 앞서 언급했듯, 이 채취된 순간은 과거를 따낸, 미래를 향해 지속되는 물질이 된다.   

 

일반적으로 사진은 여타 다른 매체(를 통해 생산된 이미지/물질)보다 실제와 가깝게 연관되어 있다고, 그렇기에 현재/순간을 훨씬 더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기술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변하지 않은 사진의 약속이다. 경험을 해석이나 가공 없이 직접 이미지로 옮겨 공유할 수 있도록만든다는 약속 말이다. 한편, 수잔 손탁은 “순간을 특권화해 놓은 것으로서, 그 순간을 계속 간직한 채 몇 번이고 다시 볼 수 있는 얇은 사물로 뒤바꿔버린다.”[4] 고 정리한다. 여기 인용된 손탁의 말은, 사진이 얼마나 현실을 정확하게 담아냈는가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사물로 뒤바꿔”버렸다는 점을 강조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이용덕에게 사진 이미지를 이용한 순간의 채취는, 그가 이후 조형 과정에서 묘사하게 될 ‘대상’을 얻는 수준에머무르지 않는다. ‘사진’에 관한 손탁의 말처럼, 작가에게 이 과정은 순간을 매개하고 물질화하는 과정으로 존재한다. 작가는 시간을 “얇은 사물로 뒤바[꾼]” 사진 이미지를 채취하고, 이를 소스 삼아 다시 조각으로 물질화하는 것이다. 여기서 순간은 순간이 아닌 것으로(the moment, not a moment), 가소적이고 분절되어 있으며 체험되는 물질로 뒤바뀐다.

 

작가가 작업의 첫 번째 과정을 “채취”로 설명한다는 점은 꽤나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이용덕에게 조각의 모티프를 선별하는 과정은 채집, 심지어는사냥에 비유되는데, 이 사냥 행위는 주와 객, 지배와 피지배라는 상하-종속적 관계라기보다, 상호-반응적인 관계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합해 보인다. “시선이 멈추는 호기심의 장면을 물질화”하는 작업은, 선택하고 사냥하는 동시에 선택 당하고 사냥 당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롤랑 바르트가 사진 이미지를 마주한 자신의 경험을 수동적인 감각/감정으로 서술하는 부분을 언급해본다. 바르트는 푼크툼을 개념화하면서 그것을 ‘찌르는듯한’ 감각으로, ‘베인 상처’나 ‘얼룩’으로 묘사한다. 이때, 푼크툼은 오로지 주관적으로 개인이 경험하는 사진에서의(사진을 통한) 만남을 설명하는 말로, 피할 수 없이 사로잡히고 ‘당하는’ 감각을 상기시킨다.[5] 이용덕 조각의 시작이 되는, 사진을 통한 현재의 취득은, 특정 순간을 이미지화하고 물질화하는 사진적 과정의 지표성에, 특히 그것의 상호관계성을 주목한다.

 

이 같은 상호관계성은 이후 조각 제작 과정에서 현재/순간의 가공과 해체, 확장의 여지를 이미 마련한다. 작가는 사진을 찍을 뿐만 아니라, 사진 이미지를 사후에 선택하고 가공한다. 주로 이미지 편집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배경을 정리하거나, 사진 속 인물을 실제와 다른 배경에 위치시키거나, 특징을 지워 익명의 대상으로 만드는 등의 편집을 한다. 때로는 한 인물을 서로 다른 여러 배경에 반복해 등장시키면서 이전과 다른 상황들을 만들기도 한다. 이처럼 사진으로부터 실제 조각의 모티브를 확정하는 작업 초반 과정은 순간과 물질, 현재와 그것의 지속을 탐구하면서, 객관과 주관, 데이터와 해석, 반영과 조작, 사실과 환영(거짓) 사이를 분주하게 오가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는 애초에 작업 속 사진이, 그러니까 일종의 물화된 이미지가 대상/순간의 투명한 반영이 아님을 드러낸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용덕 조각의 시작이 되는, 사진을 통한 현재의 취득은, 특정 순간을 상당히 직접적으로 이미지화하고 물질화하려는 시도이면서, 대상/순간에 지극히 개인적이고 수동적으로 연루되는 상호관계성의 작용이다. 그렇게 순간의 확장과 재구성, 혹은 지연과 지속의 여지를 이 역상조각이 계속 견지하고 있음을 확인해 본다. 역상조각은 기념비적 조각과는 달리 그 자체로 절대적 기호가 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마치 사진처럼 과거의 순간/대상을 지시하고 가리키는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끊임없이 관계 맺는 감각-경험을 마련한다.

 

 

  1. 전이의 감각, 감각의 전이

 

역상조각에서 시간의 감각을 회복하고, 심지어 복수의 시간을 마주하고 상상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작품 자체가 다차원적으로 그것의 인지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작가가 “전이(transfer)”라고 말한 조각의 제작 과정을 살펴보며 좀 더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 작가는 본격적인 입체 작업에 앞서 사진 이미지로 ‘순간’을 채취한다. 그렇게 채취된 이미지는 이후 소조 방식으로 입체화된다. 이를두고 작가는 “반(半)입체”를 만드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이는 흔히 ‘부조’라고 말하는, 형상이 앞쪽으로만 튀어나오는 조형에 가까운데, 작가가 여기서‘부조’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 이유는 그 조성의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주로 점토나 유토로 만든 반입체 작업은, 이후 강화플라스틱(Fiber Glass Reinforced Plastic)이나 석고를 이용한 캐스팅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렇게 반입체는 사라진다. 작업 과정을 다시 순서대로 따라가자면, 양감 있는소조가 만들어지고 난 후 그것을 떠낸 주형으로서의 껍질이 생겨나고, 여기서 양각이 뒤집힌(inverted) 공간이 ‘역상조각’을 만드는 것이다. 달리 말해, ‘역상조각’의 귀착 지점에서 그 이전 과정인 ‘반입체’는 작가의 말처럼 작품의 ‘뒷면’에 해당한다. 주형으로서의 작업 단계가 역상조각이기 때문에, 그에 선행하는 과정인 반입체는 여백일 뿐인 것이다. 일례로, 작가는 반입체와 그것의 주형을 만드는 과정/단계를 “뒤에서 만든다.”라고 표현하는데,실제로 작가는 반입체를 만드는 과정에서 이것이 뒤집힐 것을 염두에 두고 소조를 행한다.

 

이처럼 이용덕의 역상조각에서 시간과 그것의 인지는 다차원적으로 전이된다. 우선, 사진에서 출발한 2차원 이미지는 현재의 순간을 물질화한다는 의미에서 1차 전이를 겪는다. 이는 조각적 입체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두 번째 전이를 통과한다. 사진 이미지의 평면에 드리운 명암, 색채 등의 요소는 입체(실체) 안에서 구체적인 두께로 변환되어야 하고, 이것은 또 이후의 역전을 염두에 두면서 “뒤에서” 가공된다.   

 

역상조각이 되기 위해선 이로부터 또 한 번의 전이가 필요하다. 양각이 음각화 되면서 생기는 깊이 있는 공간은 빛에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조명의 조건에 따라 조각의 몸체 안에 밝고 어두운 음영을 그 자체로 갖게 되는 중요한 변화가 생겨난다. 이는 평면을 입체로 만들면서 소거하거나 다른 벡터로전환했던 ‘빛’의 요소를 다시금 인식하게 한다. 심지어 작가는 추가적인 채색을 통해 공간, 상황, 빛과 그림자의 차원을 한 번 더 강조하기도 한다. 이처럼 작가가 포착, “채취”하고자 했던 현재적 순간은, 조각의 조형 안에서 실질적으로 여러 번 전이, 변형, 다원화되고 그렇게 “순간의 지속”을 만든다. 

 

감각의 전이는 관객의 감상 차원에서도 여러 번 확인된다. 역상조각 앞에 선 관객은, 몇 단계의 복잡한 전이를 경험한다. 일차적으로 인지되는 형상은환영(illusion)에 가깝다. 그것은 우선 하나의 형상으로 읽힌다. 그러고 나서, 찰나일지라도 일정한 시간을 가진 후에라야 관객은 안으로 패인 공간감을 알아채게 된다. (심지어 작품을 촬영한 사진에서 역상조각은 음각으로 패여 보이지 않는다). 관객은 마치 암실에서 네거티브 필름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이미지를 역전시키고 가공하고 상상하게 된다. 대상의 식별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뭔가 일상적인 보기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나서, 작품에 개입하는 것이다. 관객은 몸을 움직여 3차원의 실체 주위를 서성이고, 조각이 확보하는 안쪽의 공간감, 깊이, 빛, 색의 움직임을 추적한다. 그러면서 가만히 선 이 조각이 동작 중인 듯한 착각을 하기도 한다.

 

그렇게 조각은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당연히 조각은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이는 건 그걸 보는 사람이다. 조각은 이미 만들어졌고, 수정될 수 없으며, 갑자기 움직이거나 튀어나오거나 들어가지도 않는다. 여기서 관람은 단순히 ‘본다’라는 시각적 행위가 아니라, 어떤 순간에 ‘접촉’, ‘접속’혹은 ‘관계 맺는’ 작용에 더 가깝다. 우리는 역상조각에서 그렇게 시간을 주고받는다. 작가의 현재는 지나간 시간이 되고, 관람의 현재는 그 과거와 만나며, 과거는 형성 중인 미래 안에 공간을 확보한다. 

 

작품의 제작과 수용 양쪽 측면에서 역상조각은 복합적으로 감각되는 시간의 문제를 야기한다. 반복해 말하자면, 역상조각은 대상/순간을 모방적으로복제하거나 단순히 물화해 보여주는 결과물이 아니다. 조각에는 튀어나온 것과 움푹 들어간 것, 평범한 장면과 특별한 사건, 정지된 대상과 움직이는환영이 동시에 감각된다. 눈앞의 물질을 보는 현재가 있다면 그에 선행하는 어떤 순간이 “찌르듯” 감각되고, 관객은 이를 더 당기거나 역전시켜 바라보게 된다. 

 

 

  1. 부재의 물질성

 

역상조각은 분명히 현전하는 물질인 ‘조각’으로서 자리함에도 불구하고, 사라짐과 부재를 환기하는 면이 있다. 작업의 제작 과정을 살펴보았지만, 감상의 대상으로 눈앞에 있는 ‘역상조각’에는 지금은 사라져버린, 그러나 이전 단계에서는 ‘있었던’ 무엇이 포함되어 있다. (알다시피, 제작 과정 중에 작가가 직접 손으로 쌓아 올려 만든 ‘반입체’는 그것 자체로 조형성을 갖추는 것이 아니기에 최종 작업의 측면에서는 사라졌다.) 역상조각에서 확인되는 빈공간은 분명한 형상, 전에 있었던 볼록한 형상을 지시하고 또 그것의 사라짐을 환기한다. 다시 말하면, 궁극적으로 부재하는 것을 품고 있는, 관통한물질인 것이다. 역상조각에서 존재와 비존재의 교차 혹은 역전이 마술적 착시가 가히 근원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이유다. 

 

존재의 차원에서 역상조각은 알 수 없는 상황과 사건, 인물 등이 사라지고 없는 부재를 지시한다. 과거 또는 미래라고 불러볼 수도 있는 시간, 혹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 미제의 사건과 같은 것이 ‘빈’ 공간을 차지하는 듯하다. 실제성과 결별하는 이미지가 물질로 드러나는 조각의 순간은, 단순히 무(사라짐)의 상태가 아닌, 존재와 비존재, 있음과 없음을 동시에 환기하는 이중성을 띤다.

 

위 언급한, 있고 없음을 동시에 가리키는 ‘부재의 물질성’은 이용덕의 작업 세계에서 꽤 오랜 시간 중요하게 자리해 왔다. 1980년대에 발표한 그의 인체 조각은 인체 형상의 부분을 파여 나간 흔적처럼 남겨 놓았던 작업으로, 마치 사진이 유령적으로 작동하는 것처럼, 사라짐으로써 더 강하게 인식되는 존재를 암시했다. 다시 바르트를 언급하자면, 바르트는 지금 보는 사진 이미지가 지금은 없는, 그러나 그때 거기 있었던 존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사이 존재적인 위상을 갖는다고 정리했다.[6] 비슷한 의미에서 역상조각은 존재-비존재의 사이 존재가 된다. 분명한 물질로서의 조각에서 느껴지는 부재는, 무언가 있(었)으나 없는 사진적 존재론으로 재차 설명될 수 있다

 

실제로 작가의 초기 작업 중에는 사진에 찍힌 (지금은 없는) 인물을 조각으로 빚은 것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작가가 독일 유학 중 발표한 <kl. k. 7d. 24.10. 1920 berlin>(1995)과 같은 작업은 존재-비존재의 문제를 시각화하며 역사적 차원까지 사유한다.[7] 이용덕은 벼룩시장에서 발견한 한 장의사진에서 작업을 시작했다. 1920년 독일 어느 학교에서 찍힌 남학생들의 단체 사진으로, 작가는 사진 속 아이들이 곧 독일군이 되고 2차 세계 대전을맞이하는 역사적 비극을 함께 떠올렸다. 그리고 서로 다른 시간에 얽혀 있는 사진 속 존재를 사고하면서, 그러한 사진적 시간/존재의 차원을 현재의 물질로 호명하게 되었다. 사진 속 아이들을 실제 인체 사이즈의 조각으로 하나하나 빚어 세우면서 작가는 조각의 현존을 사진의 유령성과 겹쳐 놓았다. 

 

사진에는 존재의 부재가 포함되고, 사진이 찍힌 시점과 사진을 (작가가) 보고 있는 시점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한 사건들의 존재-부재 역시 포함된다. 현재적 이미지가 증발한 과거를 망각하게 하는 게 아니라, 그 너머의 또 다른 시간·역사·존재의 층위를 사고케 한다는 점을 이용덕은 조각의 물질성으로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kl. k. 7d. 24.10. 1920 Berlin>를 포함해 《순간의 지속 THE MOMENT NOT A MOMENT》에서 볼 수 있는이용덕의 작업들은, 그의 역상조각을 이해하는 한 가지 축을 공유한다. 그것은 복수의 시간들—과거의 어느 한 순간, 그때의 현재, 지금은 부재하는 현재, 지금 여기서 물질화되어 있는 부재를 주제 삼고 있다.

 

또 다른 예로, 금속 또는 나무로 된 막대를 켜켜이 쌓아 형상의 실루엣을 만드는 최근의 작업은 모듈의 집적이라는 디지털적인 감각을 환기하는 듯하다. 하지만 여기서 막대는 단일 형상을 만들기 위해 마련된 모듈이라기보다는, 처음에 인식된 형상에 또 다른 운동감을 부여하거나 심지어 형상을 흩어 놓고 마는 역할을 한다. 작품의 가까이에 다가가거나 멀어지면서 관객은 형을 이루는 막대가 조금씩 어긋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마치 창살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쌓여있으나 정밀하게 어긋남이 조작되고 있어, 각도를 달리하면 형상이 금세 어그러져 보인다는 것도 알게 된다. 배열에서 조금씩 빗나간 틈이 빛과 그림자를 새로 구성하여 형상의 이해를 방해하고, 조각을 보는 경험은 시간 안에서 재구성되어야만 한다. “과거의 현재에 있던 순간이 빈 공간의 자취를 통해 지속되고 존재한다.”는 작가의 말처럼, 그 핵심에는 역상조각이 환기하는 시간성이 자리하고 또 확장되고 있다. 

 

 

  1. 오리지널 카피

 

오늘 전시 경험 또는 작품 관람의 경험은 다른 시간의 경험과 마찬가지로 낱장의 이미지, 파편화되고 분쇄된 개별 정보 중 하나로 축소된다. 수많은 작품, 전시들이 네트워크에 업로드되고, sns 상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사진 몇 장으로 대리 경험된다. 간단하게 휴대 전화 카메라로 찍은 사진이 작품의현존을 체험하는 일을 대체할 뿐 아니라, 무한 증식하는 사진 이미지는 시공의 감각을 초월해 그 자체의 삶을 영위한다고 까지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 이용덕 조각의 경험은 부재의 물질, 감각의 전이를 몸소 체험함으로써 얻어진다. 그것은 ‘사진’으로 찍히지 않는다. 이용덕의조각이 사진적으로 (사진의 존재론적 위상과 같이) 작동하고, 또 사진에서 출발했을지라도 그의 조각은 몇 장의 사진 이미지로는 포착되지 않는 것이다. 그의 조각은 사진 이미지로의 환원을 거부한다. 관객이 ‘역상조각’을 체험할 때 겪는 움직이는 듯한 환영, 공간감이 야기하는 상상의 영역, 수동적인 동시에 적극적인 주관의 개입을 요청하는 감각은 결코 카메라에 담기지 않는다.

 

정면에서 카메라로 역상조각을 찍으면, 음각은 양각처럼 보이고 입체의 깊이는 음영 효과를 준 평면으로 보인다. 작가의 역상조각을 웹에서 검색하면,조각 안쪽으로 손이나 얼굴을 밀어 넣는 장면을 종종 찾아볼 수 있는 것도 같은 이유다. 그렇게 지시하지 않으면 사진상에서 역상조각은 본질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 공간에서 경험되는 역상조각의 환영 효과는 시간의 지속을 허락하지만, 카메라에 찍힌 것으로서의 환영에는 그런 지연이 일어나지 않는다.

 

불가항력적으로 쏟아지는 이미지의 복제물들과 함께 오로지 현재로만 직조되는 허위의 시간성 안에서, 순간을 떼어내고 또 지속하는 일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이용덕의 조각은 사진적이지만, 무한 복제 가능한 사진 이미지로 축소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일종의 ‘오리지널 카피’라고 할 수 있다.역상조각은 순간을 채취하고 과거-현재-미래의 복잡한 상호관계를 응축하고 물질화하고 있기에 결코 평평해질 수 없다. 단독적인(singlular) 물질로서오리지널 카피는 지나간 순간, 증발하는 현재를 조금 다르게 감각할 계기를 마련할지도 모른다.

 

이용덕의 역상조각에서 시간은 다차원적으로 교차한다. 순간의 취득과 가공을 동시 진행하는 작업 초기 과정,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과 곧 도래할 시간을 “뒤에서” 빚는 중간 과정, 그리고 최종 조각의 현재적이면서도 유령적인 공간이 시간들의 복수적 관계를 감각적으로 연동시킨다. 이는 어떤 시간을 기념비적으로 기록하는 것도 아니고, 단편적인 현재주의로 시간을 상대화하는 것도 아니며, 임시성과 가변성에 기반했음에도 접촉하고 접속하는관계 맺음을 그려보려는 시도다. 

 

현시와 해체를 오가는 움직임으로, 혹은 그러한 시도의 물질화로 작가의 역상조각을 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순간이면서 순간이 아닌, 분명한 물질이면서 동시에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형상으로, 편재하는 세계를 드러내는 운동이자, 시간의 가소성을 매개하는 물질로 역상조각을 이해해본다. 작가는현재를 가변적 대상으로 전제하고, 순간을 채취하며 또 가공하고 물질화하며, 시간의 혼종적 관계로서 역상조각을 보게 한다. 여기서 조각은 존재와부재를 동시다발적으로 인지하게 하는 눈앞의 이미지이자 물질이다.

 

빛과 공간, 존재와 부재가 함께하는 조각에는, 한 번에 다 파악할 수 없는 상황과 인물이 형상으로 등장했다가 역전되고 사라지는 수수께끼가 자리한다. 분명한 물질이면서 동시에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형상이 있다. 순간이면서 순간이 아닌 시간의 관계항이 드러난다. 주형과 모형의 경계에서 작가는있고 없는 존재론적 운동을 보여주려 하고, 역상조각은 거기 매개되는 시간성을 물질화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에 직접 ‘접촉하는’ 관람의 경험은 현재화되는 이미지의 홍수 너머 실제와의 관계를 가설해볼 수 있게 한다. 시간의 채취, 순간을 떼어내고 포함하는 물질, 그것의 지속 또는반복—오리지널 카피—으로 역상조각을 이해할 때, 쉽게 정의 내릴 수 없는 동시대적 시간이 감각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필자 소개: 

권혁규는 주로 전시를 만들고 글을 쓴다. 영국 왕립예술대학에서 동시대 미술 큐레이팅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불확실한 대상을 물리적 현존으로 전환하는 큐레이팅 방법론에 관심을 갖고 있다. 기획자 운영 플랫폼 WESS의 공동 운영자(2019-2023)로 활동했으며, 연간 출판 프로젝트 『뉴스페이퍼』의 기획 및 편집을 맡고 있다. 뮤지엄헤드의 책임큐레이터(2020-현재)로«인저리타임»(2021), «모뉴멘탈»(2023), «흑백논리»(2024) 등의 전시를 기획했다. 

 

 

[1] 다음을 참고: Rem Koolhaas, ed. et al., Project on the City II: The Harvard Guide to Shopping (Tashcen, 2002).

[2] 조르조 아감벤(양창렬 옮김), 「동시대인이란 무엇인가」, 『장치란 무엇인가? 장치학을 위한 시론』 (서울: 난장, 2010), p.72.

 

[3] 이하 별도 각주 없는 인용문은 모두 작가의 말에서 왔다. 작가의 말, 2024년 인터뷰 중.

 

[4] 수잔 손탁(이재원 옮김), 「플라톤의 동굴 속에서」, 『사진에 관하여』(서울: 이후, 2005), p.39.

[5] 롤랑 바르트(김웅권 옮김), 『밝은 방』(서울: 동문선, 2006), pp.57-67.

 

[6] 롤랑 바르트는, 이러한 사진의 존재적 상태를 ‘사이에 있(었)음(interfuit)’으로 접근한다. 롤랑 바르트 (김웅권 옮김), 같은 책, p.99.

[7] 참여예술(engagement) 및 현실주의에 관한 작가의 입장은 이와 같은 역사 인식을 통해서 접근해볼 수 있다.

© 2025 by LEEYONGDEOK. Powered and secured by YD

bottom of page